동백꽃과 생강나무 꽃

2024.05.30 16:21:15

김현정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봄·봄>(1935)과 더불어 김유정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백꽃>(1936)의 말미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소 조숙한 점순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던 '나'가 자기네 닭을 거의 빈사지경(瀕死地境)에 빠뜨린 것에 분개한 나머지 점순이네 수탉을 단매로 후려쳐 죽이게 되고, 이를 무마시켜주는 조건으로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한창 흐드러지게 핀 동백꽃 속으로 쓰러져 파묻히는 장면이다. 일부러 닭싸움을 시켜 '나'의 관심을 끌려는, 점순이의 계략에 '나'가 보기 좋게 넘어간 것이다. 물론 이 둘의 풋사랑은 점순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역정이 난 소리에 일단락되지만, 그 여운은 여전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다. 특히 (동백꽃의)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아찔하였다."라는 구절은 오래도록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이후 언젠가는 알싸하면서도 향긋한 향이 나는 '동백꽃' 속에 파묻혀 보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3월이 되자 캠퍼스에 봄꽃들이 피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우리들을 반겨준 꽃은 노란 산수유 꽃이었다. 학술관에서 학생회관으로 가는 길 사이에 피어 있는 산수유 꽃이 무척 예뻤다. 학생회관과 이공학관 사이에도 예쁜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이 꽃도 산수유 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무와 꽃 이름에 해박한, 한 지인이 그 꽃은 산수유 꽃이 아니라 내가 그토록 찾던 '생강나무 꽃'이라고 일러주었다. '산수유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 꽃'이라는 점이 무척 반가웠다. 김유정 작가가 태어난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동박꽃'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백 기름처럼 생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으로 쓰기도 했다. 김유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동백꽃'이 바로 '생강나무 꽃'인 것이다. 그러나 산수유 꽃과 생강나무 꽃은 너무 닮아 있어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두 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지인에게 물으니 나무껍질(樹皮(수피))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산수유의 수피는 갈라진 듯 거친 반면에 생강나무의 수피는 매끈하다고 하였다. 지인의 말대로 두 꽃의 나무껍질을 비교해 보니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생강나무 꽃'을 발견한 나는 무슨 진귀한 보물을 찾은 듯이 기뻤다.

그날 오후 나는 '김유정의 삶과 문학'이 들어 있는 교양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 주까지 학생회관과 이공학관 사이에 있는 '생강나무 꽃'을 찍어 오라는 과제를 부과하였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을 감상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생강나무 꽃의 향기를 맡아보게 할 심산이었다.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산수유 꽃과 생강나무 꽃을 유심히 관찰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생강나무 꽃을 휴대폰에 담아왔지만, 몇몇 학생들은 산수유 꽃을 찍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알싸하고 향긋한 향이 가득할 줄 알았던 생강나무 꽃에서 향기를 거의 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지인에게 물으니 생강나무 꽃보다는 생강나무 잎을 비벼봐야 생강향이 날 것이라고 했다. 생강나무 꽃이 지고 생강나무 잎이 돋아났을 때 잎을 비벼보니 정말 생강향이 진하게 났다. 학생들에게도 생강나무 잎을 비벼 생강향을 맡도록 했다. 이를 통해 우리들은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라고 한 구절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을 정확히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짐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도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을 '생강나무 꽃'이 아닌, 남도에 피는 빨간 동백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심지어는 김유정이 1937년에 작고한 후 발간된 김유정 소설집 『동백꽃』(세창서관, 1940) 표지에도 생강나무 꽃이 아닌, 빨간 동백꽃 그림이 실려 있다. 당시 출판사 편집부에서 김유정의 <동백꽃>에 나오는 '동백꽃'을 남도에 피는 동백꽃으로 혼동하여 생긴, 웃지 못할 해프닝이다. 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독자들이 그 대상을 찾아 그것을 직접 느껴봐야 할 것이다.

창의적 사고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는 지금, 상상력의 보고(寶庫)인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대상에 대해 꼼꼼히 살피며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 매우 소중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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