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마을을 꿈꾸며

2024.01.25 14:23:22

김현정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제천과 인연을 맺은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강산이 한번 바뀐 것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주는 의림지(義林池)의 모습이다. 삼한시대에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커다란 호수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제천의 명소이다. 일찍이 옛 선비들은 의림지의 아름다운 호수의 경관을 보기 위해 이곳을 자주 찾았으며, 그 감흥을 시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정인지의 '의림지'를 비롯하여 임호 박수검의 '의림호에서 차운(次韻)함'과 '을해년 늦봄에 의림호에서 놀며 짓다', '의림지에 썰매타기 놀이', 옥소 권섭의 '의림지에서 짓다', 학고 김이만의 '의림지의 폭포를 보며', 의당 박세화의 '의림지', 계릉 정운호의 '의림지 낚시하는 늙은이', 이중우의 '의림지', 양진환의 '의림지', 계당 김창진의 '의림지', 김금원의 '의림지' 등이다. 이 중 의림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임호 박수검(1629~1699)의 한시 '을해년 늦봄에 의림호에서 놀며 짓다(乙亥暮春遊林湖作)'는 더 눈길을 끈다.

"아득한 고기 물결 녹음 짙은 의림지/ 거울 속에 산 그림자 불쑥불쑥 비치네./ 꽃은 바람에 어지러이 떨어져 봄은 살구나무에 깊었고/ 안개 낀 버들은 고개 숙여 비온 뒤 버들개지 날리네./ 물가에서 경쾌하게 노 젓는데 갈매기는 유유히 떠있고/ 옛 단(壇)위의 늙은 소나무에 학은 천천히 돌아오고/ 자소(紫簫) 소리 나더니 어느 새 금잔에 술이 가득/ 술에 취해 현로(縣路)조차 분간할 수 없네."라고 노래한다. 의림지의 아름다운 늦봄의 풍경과 그 풍경에 취한 시적 화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녹음이 짙은 의림지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물고기와 호수에 비친 산 그림자가 있고, 살구꽃이 떨어지고, 버드나무 가지가 날리는 의림지의 풍경도 보인다. 배를 타고 노 젓는 사이로 갈매기가 날고, 노송 위로 학이 돌아오는 광경도 보인다. 퉁소 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낭만이 가득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의림지에서 낚시하는 노인을 노래하는 시도 있다. 계릉 정운호(1862~1930)의 '의림지 낚시하는 늙은이'이다. "의림지 뛰어난 경치 제천을 떨치게 했는데/ 낚시하는 늙은이 맑고 한가로워 세상 밖에서 노니네./ 비바람에도 돌아가지 않는 뜻 화락의 풍취,/ 산하와도 바꿀 수 없는 자릉(子陵)의 부류로세./ 봄이 오매 이 내 몸 바위 위 제비와 짝하고/ 늙어감에 이내 맘 물가의 배와 함께 하네./ 우륵대는 비었어도 용폭은 남았으니/ 한 길의 아름다운 경치 한 낚싯대로 거두네."라고 읊조리고 있다. 의림지의 뛰어난 풍경과 낚시하는 이의 무심한 심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바람에도 돌아가지 않고, 산하와도 바꿀 수 없는 의림지를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봄이 되면 제비와 짝하고 늙어서는 물가의 배와 함께 하고 싶은 욕망도 표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륵대는 없어도 지금도 볼 수 있는 용추폭포가 있어 이 아름다운 경치를 낚시대를 드리워 거두고자 하는 심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많은 옛 선비들은 제천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의림지의 풍경을 시로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작년에 작고한 오탁번 시인(1943~2023)의 마지막 시집 『비백(飛白)』에도 의림지의 아름다운 풍경이 등장한다. "9대조 할아버지의 문집 『연초재유고(燕超齋遺稿)』에는/ '의림지(義林池)'라는 글이 있는데/ '지재현치북이우명(池在縣治北牛二鳴)'이란 말이 나온다/ 현치의 북쪽/ 소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 의림지가 있다는 뜻이다/ 일우명지(一牛鳴地)라는 말을 살짝 꼬아서/ '소 두 마리의 울음소리'라고 한/ 할아버지의 솜씨가 천하일품이다/ 이우명(二牛鳴)이란 말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말 하나하나 고르느라 노심초사 하신/ 연초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제천 백배미에 살았는데/ 생전에 의림지를 자주 찾아 거닐며/ 주옥같은 글을 여러 편 남기셨다// 유고에는 '진섭헌(振·軒)'이라는 글도 있다/ 서쪽 산 중턱 별서(別墅)에서 본/ 의림지의 경치가 으뜸이었나 보다/ '진섭'은 나막신을 턴다는 뜻으로/ 집을 지을 때 인부들이 신발에 흙을 묻혀 날라/ 담장에 발랐다는/ 명나라 왕원미(王元美)의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진섭헌에 오르면/ 반나마 보이는 의림지 물낯이/ 미인 서시(西施)의 옆얼굴 같다고 했다"('소 두 마리의 울음소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당시 스승에게 최치원과 이색에 비견될 만한 문장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시재(詩才)에 뛰어난, 연초재(오상렴, 1680~1707)의 멋진 표현을 엿볼 수 있다. 제천 백배미(현 동현동)에서 의림지까지 15리쯤 되는 거리를 '소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릴만한 곳으로 표현한 데에서, 서쪽 산 중턱 별서(別墅)에서 본 의림지의 모습을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인 서시의 옆얼굴에 비유하여 표현한 데에서 말이다. 의림지를 찾아 '소 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릴만한 곳인지, 의림지 물낯을 보며 서시의 옆얼굴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쉬운점은 이렇듯 의림지를 노래한 훌륭한 시들을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의림지를 찾는 이들에게 의림지를 노래한 멋진 시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시비 공원이 조성되기를 기대해본다. 물론 제2의림지 인근에 제천시비공원(권오순, 오탁번, 김준현, 박지견 시비 등)이 조성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그곳은 의림지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외진 곳에 있고, 홍보도 덜 된 탓인지 찾는 이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의림지 주변에 의림지에 관한 시를 시비로 세워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하게 하고, 이와 연계하여 제2의림지 쪽에 위치한 시비공원을 탐방하게 한다면 제천과 의림지를 찾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논어』에 보면 '近者悅 遠者來'(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온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처럼 제천 시민들이 먼저 우리 지역의 문학을 공감하고 향유하는 일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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