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대한 단상

2024.11.28 14:24:03

김현정

문학평론가·세명대 교수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첫눈이 제법 쌓였다. 지붕에 쌓인 눈이 한 뼘 정도는 족히 될 것 같다.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변한 것을 보니 세상이 달리 보였다. 맑고 깨끗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비'와는 달리 겨울에만 오는 '눈'은 많은 사람들에게 동심을 갖게 하고, 낭만에 젖게 하고, 정화된 마음을 갖게 하는 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문득 윤동주의 시 <눈 1>이 떠오른다. 시인은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라고 노래한다. 쌓인 눈을 '이불'로 보는 시인의 따뜻한 심성을 엿볼 수 있다. 각박하고 힘든 식민지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추위에 떨게 하는 '눈'이 아닌, 추위를 덮어주는 '따뜻한 이불'과 같은 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소―복'이 담겨 있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은 김희정의 시 <꼬마 눈사람>에서도 확인된다. "한 여름 냉동실에서 눈사람이 발견되었다/ 지난 겨울 딸아이가 넣어놓은 것이다/ 상태는 그래도였다/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고/ 온 몸이 얼어붙어/ 저체온증으로 숨을 거둔 것일까/ 입이 굳게 닫혀 있다/ 어린 딸이 눈사람을 보고 경기(驚起)를 한다/ 딸아이는 울먹인다/ 영.원.히.살.게.하.려.고…."라고 한 데서 아이의 따뜻한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아이는 아빠, 엄마와 함께 만든 꼬마 눈사람이 녹아 버릴까봐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 몰래 냉동실에 넣어 놓았을 것이고, 이후 그 눈사람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렸을 것이다. 두 계절이 지난 뒤에야 냉동실에 있는 '눈사람'이 발견된 것이다. 그 눈사람을 본 아이가 경기(驚起)를 하며 한 말, "영.원.히.살.게.하.려.고…"라는 것을 통해 우리는 순간 무장해제가 된다. 눈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아이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도현의 시 <우리가 눈발이라면>을 통해서도 '따뜻함'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세 살이 되자"라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눈발이 된다면, '진눈깨비'보다는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비록 "바람 불고 춥고 어"두운 세상일지라도 '사람이 사는 마을'의 '가장 낮은 곳'에 사는 이들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따뜻한 함박눈'이 되기를 희망한다. 또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잠 못 든 이"의 편지가 되고, 그들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고 노래한다. 힘겹고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뜻한 함박눈'을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이 잘 담겨있다.

눈이 내리는 날, 소포를 통해 어머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고두현의 시 <늦게 온 소포>도 눈길을 끈다. 경남 남해를 떠나 객지 생활을 하던 시인은 어머니가 보낸 커다란 소포를 받는다.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어머님 겨울안부"가 담긴, "남쪽 섬 먼 길"을 달려온 소포를 풀기 시작한다. 겹겹이 싼 두터운 마분지를 하나 둘 풀고 오래된 장갑과 버선을 벗겨내어 한지더미에 싸인 '남해산 유자 아홉 개'를 발견하게 된다. 유자가 터지지 않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보내주신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시인을 더 감동하게 한 것은 유자와 함께 보낸 '어머니의 손편지'였다. 어머니가 서투른 글씨로 쓴,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몇 개 따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라는 편지를 말이다. 어머니의 따뜻한 음성이 담긴,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좋은 일도 안 잇것나", "어렵더라도 참고 반드시 몸만 성키 추스르라"라는 쓴 글씨를 통해 객지생활로 힘들었던 시인의 마음이 눈 녹듯 서서히 풀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눈은 우리들에게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하고, 동심으로 돌아가게 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도 한다. 가끔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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