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못 낀 등신

2017.01.22 16:03:01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셨나요?"

사석에서 난데없는 질문을 받았다. 해맑게 고개를 흔들었더니 돌아오는 말이 쇠망치 같다.

"별 생각 없이 지내셨군요"

이쯤 되면 뇌진탕에 버금가는 손상이지만 짐짓 표정을 관리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주고 말았다. 하긴 웃고 말 수밖에 별 대책이 있겠는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못 낀 등신의 수모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을 때 문화계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위 문화계의 인사들은 한 목소리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예술인에 대한 감시와 비인도적 검열행위를 자행한 주범을 밝혀 다시는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는 억울한 대상자의 항의보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자들의 "나도 넣어라"는 요구가 한층 거셌던 점이 의외다.

행여 자신의 이름이 없을까봐 좌불안석이던 인사들 중 몇 명은 9473명의 명단에 오르지 못한 것이 치욕스럽다며 분을 감추지 않았다. 대표적 인물이 '정치에는 다시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는 작가 이외수다. 그는 SNS를 통해 '극심한 소외감과 억울함을 금치 못했다'며 명단에 누락된 자의 분노를 거르지 않고 피력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훈장이라도 받은 듯 가슴을 펴고 웃고 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명단을 살펴보았다. "참 다행이다"라고 밝힌 안도현 시인과 "영광입니다. 각하, 일개 요리사를 이런 데 올려주시고"라고 비아냥거린 박찬일 요리연구가의 발언은 감칠 맛 나는 유행어가 됐다.

블랙리스트가 전화위복이 된 인물도 있다. 여성 팬들과 일로 얽힌 관계자를 나이에 따라 '늙은 은교', '젊은 은교', '어린 은교'로 구분하며 희롱해 구설에 올랐던 소설가 박범신은 이번 블랙리스트로 절묘한 물 타기를 했다.

운 좋은 노작가는 블랙리스트 명단에 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고 "스스로 앞장서 예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시대착오적인 자들을 일꾼으로 거느린 대통령이 불쌍타"란 글을 남겼다.

스스로 앞장서 예인들을 적으로 만든 행동으로 치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그가 아닌가. 정부가 만든 온당치 않은 블랙리스트가 아닌 온전한 국민의 블랙리스트에 자신이 올라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촛불집회 무대에 선 이승환은 "문화계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한, 그래서 마냥 창피한, 그래서 요즘 더욱 분발하고 있는 가수입니다"라고 자조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이 소설가의 표현처럼 극심한 소외감과 억울함을 느껴야하거나 가수의 한탄처럼 마냥 창피한 일이어야 할까.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예술가들도 국가로부터 소외당한 것은 매 일반이다. 목소리를 죽이고 있었기에 혜택의 뒷전에 밀려있는 경우가 어쩌면 더 많았을 수도 있었다.

일예로 거의 50년이 된 청주예총건물은 낡다 못해 흉흉한데, 설상가상 난방시스템조차 없다. 각 협회별로 몇 평 남짓한 사무실이 있으나 관리 보조금은 전무하다. 창립 60주년을 맞아 60년사를 정리 중인 문협의 원로는 창고보다 나을 것 없는 먼지 쌓인 공간에서 지금도 재채기를 해가며 손수 작업 중이다.

'필론의 돼지'는 이문열의 소설로 알려진 우화다. 바다에서 풍랑을 맞은 철학자 필론은 곧 닥칠 죽음 앞에서 울부짖고, 기도하며, 뗏목을 엮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배의 밑바닥 창고로 들어간다.

그 곳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재난 앞에서 아무 대책이 없던 철학자가 돼지 옆에서 같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폭풍우는 잠잠해져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준 최고 훈장이 된 블랙리스트 풍랑 가운데서 필론의 돼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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