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부추긴 '블레임 룩'

2017.01.15 14:13:04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정유라가 덴마크에서 체포될 당시 입고 있던 패딩 야상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지나치게 친절한 언론의 취재 탓이다.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가십성 기사 덕에 국민들은 고가 패딩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기자는 정유라의 패딩이 캐나다산 고급 브랜드 '노비스' 제품으로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이라 주장했다.

의복에 대한 관심은 패딩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패딩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가 스타워즈 UT모델 한정판으로 스타워즈 팬들 사이에선 부르는 게 값인 명품이라고 덧붙였다.

정씨가 입고 있는 패딩과 티셔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강조하면서 성급히 블레임 룩 현상을 점친 기사내용은 식상하기 짝이 없다.

블레임 룩이란 근본 없는 조어가 사회현상처럼 자리 잡은 지 한참이다. 20여 년 전인 1997년,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 됐을 당시 입었던 몹시 튀던 무지개색 티셔츠가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미소니사의 제품으로 알려지면서 전국의 시장좌판에 미소니 모조품이 깔렸었다. 욕하면서 따라한다는 블레임 룩의 탄생배경이다.

신창원의 티셔츠는 조악한 모조품이었다.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거리에 침을 뱉으며 다니던 철부지 청소년들이 삼손의 터럭이라도 되는 듯 티셔츠에 열광했다. 가품을 카피한 가품이 당시 인기 있던 조폭영화에 편승해 반짝 유행을 탄 우스운 사회 현상은 그 후 블레임 룩이란 이름으로 툭하면 기사거리가 됐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이름도 입에 올리기 싫은 정유라의 옷을 따라 입고 싶어 한다는 소리인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자의 주목성에 쏠려 생각 없이 추종하는 행위로만 보자면, 블레임 룩을 들먹이며 저급한 관심을 유도하는 기사에 블레임(blame)을 붙여 질타하는 것이 합당치 않을까.

더 한심 것은 기사내용의 왜곡이다. 기자가 노비스 패딩이라 지적한 정유라 패딩은 해당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고 한다. 기사가 뜨고 난 뒤 해당 브랜드를 수입, 판매하는 업체 관계자는 "호기심에서 제품 확인을 문의하는 고객이 많아 이전 모델까지 모두 찾아봤지만 우리 제품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패딩의 디테일이 노비스와 많이 다르다며 해당 제품이 자사 제품이 전혀 아니라는 업체의 발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보를 낸 기사는 내려지지 않고 있다. 무책임하게 검증 되지 않은 원본기사를 복사해 올린 수많은 기사들 역시 버젓이 살아있는 상태다.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알려져 있다던 티셔츠 역시 스파 브랜드 유니클로에서 제작한 3만 원 정도의 제품으로 밝혀졌다. 한정판이라 구하기 어렵다는 이 티셔츠가 현재 이베이 경매에 약 80달러로 나와 있는데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에 입찰자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

영상이 공개된 후 각종 SNS와 온라인커뮤니티에서 문제의 패딩과 티셔츠가 논란이 됐다는 보도는 어느 정도 맞다. 그러나 고가의 명품을 걸친 '입시 비리녀'에 대한 공격보다 패딩과 티셔츠에 대한 명품진위 검증이 한층 더 논란거리였다. 제멋대로 추측기사를 쓴 기자에 대한 걱정도 한몫했다.

언론은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블레임 룩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지만 정유라의 치장에 환호하며 따라 입고 싶어 하는 국민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같은 옷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입고 싶지 않을 마음이 들 것 같다. 비난받을 자의 생활이나 행동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슈가 되고 있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일 뿐, 그의 행적을 닮고자 함이 아니다.

과거 신창원은 언론의 최대 수혜자였다. 다투어 다룬 블레임 룩 현상 기사 덕에 그는 몸이 드러나는 현란한 미소니 티셔츠의 패션 스타로 남게 됐다. 무려 108번의 강, 절도와 살인을 저질렀으며 수형 중 탈옥까지 감행한 극악한 범죄는 뒷전으로 밀렸다. 언론이 만든 본말전도의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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