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인 나혜석

2016.12.12 15:29:50

류경희

객원 논설위원

1896년 4월28일, 경기도 수원 '큰대문 참판댁'에서 여자 사람이 태어났다. 아버지인 나기정이 부유한 개명관료였던 덕에 4남매 중 셋째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딸은 영특한데다 미모까지 빼어났다. 그녀는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조선 최초의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 유학생이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최초의 여성일본유학생,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를 연 화가, 최초의 유럽 방문 여성, 최초의 이혼녀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는 개화기의 특별한 신여성 정월 나혜석의 이야기다.

도쿄에서 서구 문물과 사조에 눈을 뜬 그녀는 조선의 가부장 제도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 지를 깨닫고 여성 운동의 선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19살에 발표한 '이상적 부인'이란 글은 좋은 남편 훌륭한 아버지에 대한 교육은 없고 여자에게만 각종 의무를 교육하려는 것은 대단히 재미없는 일이라는 항변이다. 지금은 읽는 내내 미소가 지어지지만 여자의 위치가 집에서 기르는 가축보다 중하지 않았던 1914년 당시로선 경천동지할 도발로 여겨졌을 것이다.

유학중 유부남 최승구를 만나 교제하던 나혜석은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딸의 일탈에 머리를 앓던 아버지가 결혼을 강요했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서울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도 가부장제를 부정하는 계몽소설 '경희'와 '희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하며 여성 계몽 운동에 게으르지 않았던 그녀는 1919년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 운동가들과 함께 비밀 집회를 열다가 체포되어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만난 남자가 변호사 '김우영'이다. 도쿄 유학 시절부터 그녀를 연모했던 김우영의 변론으로 무죄 방면이 된 나혜석은 이듬해 그와 결혼했는데 신문에 기사로 오를 만큼 떠들썩한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모든 것을 베푼 남자다. 나혜석의 결혼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사랑해 줄 것, 그림 활동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같이 살지 않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줄 것. 지금도 쉽지 않은 요구를 김우영은 선선히 받아들이고 지원했다.

평생 꽃길이 보장됐던 나혜석의 인생은 남편과 떠난 파리여행에서 운명이 바뀌어 버렸다. 박학하고 예술에 조예가 깊던 최린을 만나 그에게 혼을 빼앗겼던 것이다. 재불 조선사회는 물론 고국에까지 퍼진 엄청난 스캔들로 인해 결국 그녀는 서른다섯 나이에 이혼 당한다.

이혼을 하며 나혜석은 '이혼고백서'를 기고했다. 그러나 남성 중심사회에 대한 항의이며 여성이 독립된 주체임을 알리는 선언을 한 그녀를 세상은 질시했다. 설상가상, 불륜 상대인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그녀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 당했다. 나혜석 작품 소장가들이 귀하게 구했던 작품을 내다버릴 정도였다.

세상으로부터 내쳐진 후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무연고자로 50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그녀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무덤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0일은 나혜석의 68주기였다.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아름답고 재능 있던 여성 나혜석. 그녀가 비극적으로 몰락한 원인은 지나치게 앞서간 그녀의 지성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래서 그녀가 더욱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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