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방불명된 광복단원(?) 우환규

2015.08.17 15:57:57

이상주

중원대 한국학과 교수

2015년은 광복 70년이 되는 해다. 수 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광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그중에는 본의 아니게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활동하다보니 기록을 남기기도 힘들고 남겼어도 타계한 사람의 경우, 동지들이 그 항일운동 자료를 수습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며, 수습했더라도 그 후손의 연고지를 몰라 관련자료를 전해주지 못했을 수 있다. 더 늦기전에 한 분을 소개한다.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출신 우환규(禹桓圭 1889.2.15.~·)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는 1908년 2월 29일 집을 떠난지 3일 째되던 밤에 집으로도 못 들리고 '연원화숙(淵源和塾)'으로 들렸는데 피곤해보였다한다. 할 일이 있어 중국으로 간다고하며 떠났다고 한다. 그후 누군가 그 아버지 우현정(禹顯鼎 1871~1935)을 찾아와서 군자금을 받아가곤 했다한다. 중국에서 인편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남아있다. 봉투 앞면에 "수두 김계산성극운 단명 광복단(首頭 金桂山星極云 團名 光復團)"라고 썼다. 봉투 뒷면에 "신미년(辛未年) 팔월(八月) 삼일(三日) 신훈씨 자천진호동노유구 우덕성가서 함지래(辛薰氏 自天津胡洞老楡溝 于德盛家書 函持來)"라고 썼다. 신미년은 1931년이다. 김성극은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단체 광복단 단원이다. 우현정의 친우주소록에 유인석과 함께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이소응(李昭應 1861∼1928)의 주소를 기록해놓았다. "중국 봉성현 동대가 덕원무소외(中國 奉城縣 東大街 德原務小·)". 이런 정황으로 보아 우환규는 광복단 등 광복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치하 광복운동하는 가족이 있으면 남은 가족이 피해를 보기 때문에 은밀하게 다른 사람편에 소식을 전한 듯하다. 이후 연락두절이다. 우환규의 부인 안동 권씨(1887~1953)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살다 일생을 마쳤다.

'왕대밭에 왕대난다' 우환규가 항일활동에 나선 것은 그 아버지 우현정의 영향이 컷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현정의 장남이다. 우현정은 1906년 고향 충북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255번지에 우석규(禹錫圭), 우석동(禹錫東), 우현무(禹顯武)등과 '연원화숙'을 설립했다. 같은 해 서울에 휘문의숙과 숙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시대사조에 민첩하게 부응병진한 교육애국자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할 조짐이 짙어지자 고향주민들에게 위정척사(衛正斥邪) 항일정신을 고취앙양하기 위해서다. 우현정은 주채기(周采驥), 화서학맥의 박세화(朴世和), 송소용(宋炤用), 윤응선(尹膺善), 윤정학(尹正學), 이근원(李根元), 최상룡(崔翔龍), 한성이(韓星履)등과 교유했다. 이들은 거의 연원화숙에서 강학을 했는데, 막내아들 우인규(禹仁圭·1896~1967)는 이들에게 수학했다. 우현정은 몸으로 광복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교육항일의 정신으로 연원화숙을 설립한 것이다. 우환규는 가문의 위정척사정신을 이어받아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광복은 내가 하지 못한 선열들의 헌신으로 얻은 것이다. 내 대신 희생한 분들에게 백번 감사하며 부국강병 문화대국의 초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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