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중
조용하던 집안에 갑자기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기 있던 신문 어디 갔니?"
고등학생이던 나는 어린 동생들과 함께 기겁을 하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 앞에 섰다. 책상에 있어야 할 오늘자 신문이 없어진 것이다. 이곳저곳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잠시 후 어머니가 들어오시면서 신문의 행방이 밝혀졌다. 무언가 급히 쌀 게 필요해서 마침 눈에 보이는 신문을 사용한 것이다.
그날 두 분은 밤늦도록 크게 다퉜다. 신문이 발단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오만가지가 다 싸움거리였다. '신문만 보면 돈이 나오느냐 쌀이 나오느냐' '그깟 신문 때문에 나를 잡느냐' 하면서 울분을 터뜨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내 마음을 울렸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신문을 큰 보물처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그날 후유증으로 신문만 보면 "저놈의 신문…." 하면서 불평하시고, 아버지는 변함없이 날마다 신문을 읽으셨다. 뭣 때문에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보시는지 늘 궁금했었다.
시골에 살던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갑작스런 퇴직으로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청주로 이사 왔다. 나와 동생들은 도시에 와서 살게 된 것이 마냥 좋기만 했는데 어머니는 늘 근심어린 얼굴이었다. 가끔 어머니의 푸념소리도 들렸다. 아버지가 직장에서 상관의 잘못된 지시로 업무를 처리하다 바보같이 혼자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조그만 가게를 시작한 아버지와, 그 벌이가 시원치 않아 여기저기 일을 다니던 어머니는 서로 늘 불만을 품고 살았다. 아버지는 덜렁거리는 어머니가 맘에 들지 않았고, 어머니는 돈도 못 버는 아버지가 툭하면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는다고 야단이었다. 난 어머니 편이었다. 어머니가 힘든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난 대학진학에 실패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신문 한 장을 보여주면서 공무원 시험을 보라고 권하셨다. 신문에 시험공고가 난 것이다. 공부해서 대학을 가라고 채근하던 엄마는 펄쩍 뛰었지만 나는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처음으로 신문에 내 이름이 실렸다.
지면에서 보는 이름 석 자는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그 뒤로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아버지처럼 매일 신문을 보게 됐다. 아무도 펼치지 않은 새 신문의 잉크 냄새가 점점 좋아졌다.
그 뒤 많은 세월이 흘러 칠순을 넘긴 아버지는 큰오빠 댁에서 살고 계셨다. 어느 날, 건강이 좋지 않던 아버지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서니 아버지는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찾아온 딸을 보고는 "넌 언제 왔니·" 물어보신다. 잠깐 나갔다 다시 들어오니 아버지는 아직도 신문을 보고 계신다. 나를 보고 또 묻는다. "넌 언제 왔니·"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신문은 아까 펼쳐진 그대로 있다. 시선도 그대로다. 아버지는 치매가 점점 깊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요즘 나도 매일 신문을 보고 있다. 아침마다 잉크냄새를 맡으며 아련한 향수에 젖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옛날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퇴직 후 사회와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로 신문을 택한 것 같다.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밀려드는 외로움 또한 신문으로 달래지 않았을까. 한 장의 신문을 보고 또 보고 하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먼 미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진다.
오늘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니 신문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근무하는 아들에게 웃으면서 물어본다.
"얘야, 오늘 신문 어디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