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지는 국민 학교 시절

2014.11.26 13:50:11

김형식

회남초 교장·아동문학가

국민 학교란 말이 없어져서인지 자판으로 국민 학교를 붙여 쓰면 자동으로 초등학교로 바뀐다. 일본이 식민지화하기 위해 쓰던 명칭이라 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6,70년대 국민 학교를 다닌 세대는 국민 학교라는 이름에 익숙해 있고 그리워한다. 그 시끌벅적하던 운동장에 다시 가고 싶다.

코 닦을 손수건은 입학생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요즘 아이들을 코 흘리는 아이들이 없는데 그 때 아이들은 코를 흘리다 훌쩍이거나 소맷자락에 쓱 닦는 아이들이 많았다. 가슴에 하얀 손수건을 달고 그 위에 이름표를 붙이고 입학하던 날의 두려움과 설렘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 느낀 감정이다.

'앞으로 나란히!' 선생님의 구령에 맞추어 두 팔을 가지런히 벌리고 서던 입학식. '하낫 둘~' 선생님의 구령에 '셋 넷'하고 따라 다니던 친구들 모두 그립다. 어느 날 따스한 교실 창가 밑에 모여 선생님의 시범에 따라 율동을 배웠다. 앞에서 나비야~ 나비야~ 하면서 팔을 팔랑팔랑 흔들고 고개를 까딱까딱하시는 선생님을 보고

"어른이 저게 뭐하는 짓(?)여"

친구가 무심코 툭 뱉는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눈을 살짝 흘기셨지만 '꾸중 들으면 어쩌지'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었다. 유치원이 없던 시골학교 입학생에게는 선생님이 노래 부르며 앞에서 율동하는 것이 어른이 할 짓이 아니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시절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 앞에서 엄하고 점잖은 모습만 보여 줬다. 그러니 어른인 선생님이 하는 행동이 이상해 보인 것은 당연하다. 나는 또렷이 기억하는데 그 친구는 생각이 안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길 할 때마다 서로 그 철없음에 웃음 짓곤 한다.

그렇게 철없이 굴며 성장해 나간 가장 순수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다. 내가 다니던 때는 입은 옷이 부실하고 난방 역시 부족한 땔감으로 부실하던 때라 우린 너무 추웠다. 손발이 시려 오들오들 떨던 그 시절 3학년쯤일 것이다. 교실이 모자라 창고에서 배우며 겨울을 보냈다. 창고 뒤쪽은 흙벽이 무너져 바깥이 훤히 보이고 난로는 왕겨를 땠는데 자주 연통이 막혀서 불이 피질 않았다. 난로 위에 깔때기 같은 통을 세우고 그곳으로 왕겨를 부어 살살 태워 내리게 하는 것이다. 그을음으로 자주 막히는 연통 때문에 불 피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눈물 콧물 흘리며 불을 피우던 선생님이 왕겨 통을 들어 창고 밖 마당에 내팽개치신다. 착한 친구가 냉큼 달려 나가 주워온다. 우리는 긴 의자에 둘씩 붙어 앉아 얼은 몸으로 선생님만 바라봤다. 춥고 긴 겨울을 보냈지만 골마루까지 교실을 만들어 쓰고 그것도 모자라 남자 반 아이들은 면사무소에 가서 공부하기도 했다.

반세기도 안 되어 이렇게 교실이 텅 비어 버릴 거란 생각은 아무도 못했다. 냉난방이 잘되고 첨단의 시스템을 갖춘 교실이지만 아이들이 없다. 시골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신흥 도시 말고는 입학하는 아이들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취학통지서가 나갈 시기가 다가오지만 빤하다. 그저 학교라는 첫 번째 이미지를 곱게 간직하고 커갈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모여드는 풍금소리 정겨운 교정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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