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역사상 세 명의 여왕이 있었다.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었던 데는 신라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지만,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여느 왕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통치력을 발휘해 삼국통일부터 신라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마지막 여왕인 진성은 무능하고 음탕하여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알려졌다. 오늘은 진성여왕의 생애를 통해 남성중심 역사 속에서 여성인물들이 어떻게 평가받았으며, 여성의 관점으로 여성을 재조명해야 하는 일들이 왜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신라 멸망의 원흉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이미 신라말 위기의 시기에 즉위한 진성은 신라 역사를 정리하는 '삼대목'을 집성케 하고 화랑세력과 중앙의 통치력을 강화하여 국가 위기를 극복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미소년들과 은밀히 내통하여 국정을 망쳤다는 비난을 받아 왕임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여성이라는 오명을 안았고, 어쩌면 그 오명에 의해 통치기간의 모든 업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진성은 모든 수습이 실패하자 자신의 부덕함을 내세워 스스로 후계자에게 양위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은 여왕이었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미덕이자 동시에 한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성여왕의 지도력, 정치가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녀가 통치를 잘못해서 신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면서 나태해진 신라 귀족들과 그 이전의 여러 왕의 잘못이 더 크다. 이미 곪아버린 신라의 정치를 진성이 바로잡기에는 시간상으로 너무 늦었던 것이다. 후대인 고려 시대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사관이 진성여왕, 심지어 선덕, 진덕 여왕의 통치를 폄하했고, 이후 우리나라에는 1천100여년이 넘도록 여성 통치의 시대는 없었다.
진성이 남성이었다면 역사의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역사 속 수많은 왕이 수십 명의 후궁을 두는 것에 대해 역사는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통치력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세력을 모으지 못한 왕이자 여성이었기에 진성의 통치는 사생활에 더욱 집중되었고 음탕한 여성이라는 오명 뒤에 모든 노력과 업적은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여성에 대한 사료들은 거의 다 남성 기록자가 그들의 가치관에 근거한 시각으로 보고 걸러서 기록한 것이다. 이제 남성의 가치관이 아닌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 속 여성인물을 재조명하는 일, 역사 속에 묻힌 여성들을 발굴해 그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차세대에게 미래사회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이끌어 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역할모델을 제시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우리 여성발전센터는 올해 지역 역사 속의 여성인물 발굴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지역 여성인물은 '성차별'에 대한 장벽은 물론이고 '지역'이라는 장벽을 극복하고 시대를 앞서 간 인물이기 때문에 발굴 자체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여성연구자로 역사에 접근하면서 그 작업들이 충분한 역사적 전문성을 갖출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여성들도 있었고 그들을 여성의 관점으로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몫이기에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