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기억

2014.01.26 15:25:40

김경수

점심시간이 지난 어느 오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통장 안에 돈이 없어진 것이다. 동네 은행 창구 앞에 창백하고 초조한 얼굴의 백발노인이 보인다. 언뜻 보아 80세 정도, 깡마른 체구, 수척한 몰골에 몹시 지친 듯 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극도로 긴장한 눈빛은 어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광채를 뿜고 있었다.

시간이 멈춰졌던 것일까. 사라졌던 것일까. 그 순간 영혼은 이 세상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일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어찌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은행 여직원의 말을 사실대로 믿기 어려운 듯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자꾸만 무엇이 켕기는지 요리조리 스스로 되묻고 되씹는 듯 보였다.

두 시간이 지났다. 은행창구 주변을 서성이며 떠나지 못하고 있다. 저만치 귀를 빌어 본다. 더듬더듬 어눌하고 거끌거끌 숨찬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노인은 돈을 찾은 일이 없다고 한다. 여직원의 얼굴이 깜짝 놀라 붉어진다. 이미 해지가 된 통장이다.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우린 종종 황당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 여러 일 중에 주었다는 자와 받았다는 자의 말이 서로 다를 때, 때론 심지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를 볼 때가 있다. 그 상황과 입장에 따라 어느 순간 기억을 외면 당할 때가 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직원이 거래내용을 일러준다. 오로지 노인 기억 속에서만 돈을 찾은 일이 없는 것이다. 노인의 한숨 소리에 창구 앞이 가라앉는다. 누구에겐 대수롭지 않은 돈일지 몰라도 노인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돈일 것이다. 막막하기 그지없다. 노인의 머릿속엔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을 것 같다. 차라리 눈 덮인 세상이라면 다소 위안이 될까

사실은 사실대로 냉정하다. 돈은 돈대로 냉정하다. 세상은 세상대로 냉정하다. 노인의 하얀 기억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는다. 붉은 눈시울을 보듬어 줄 여지도 없어 보인다. 우리는 늙는다. 그리고 기억들도 잃어간다. 비단 노인에게만 하얀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2013년 계사년을 보내야만 했다. 나이테 하나를 더해가며 수 없이 그래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세워두었던 반성과 다짐은 어디로 가고 하얀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 적이 많다. 우리는 잊혀지는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노인은 돈을 잃은 것이 아닌 것이 아니라 하얀 기억 속을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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