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멀치감치 물러난 우리집 외진곳에 흰눈이 쌓였다. 나는 한설을 녹이며 마당에 쌓인 눈을 쓸어내린다. 한낮의 빛을 잃은 태양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그자리를 맴돌고 있다. 귀촌을 결심하기 전 나에겐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김장김치를 넉넉하게 담궈서 독거노인들이나 이웃과 나눠먹고 싶은 그런 꿈, 그 꿈을 위해서 야산 언덕에 자리한 고추 따낸 땅에 배추를 300포기 심었다.
속이 노란 알찬 배추를 뽑는다. 대전에 살고있는 아들과 며느리 손녀들과, 전주 딸내미네 식구들이 모두 도착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면서 달려드는 목소리로 온 집안이 떠들썩하다.
어느새 마당에는 남편이 장작불을 지피어놓았다. 배추를 반 잘라 녹여놓은 소금물에 담궜다. 켜켜히 소금을 쳐 두었던 배추가 간이 들었다. 씻어서 소쿠리에 건지는 일은 아들과 며느리가 맡았다.
양파껍질과 파뿌리, 북어머리를 준비한다. 표고버섯은 마을 표고농장에서 구해 말려놓았고, 고추가루는 우리 농사지은거로 사용했다. 마늘은 마을에서 직접 구입해서 찢어 냉동시켜 놓았고, 생강은 7년전 효소로 만들었던거를 사용했다. 새우젓, 까나리액젓, 멸치액젓은 여행다니면서 산지에서 직접 구입해둔 것을 이용했다.
마당 한켠에 큰 솥을 걸었다. 진한 국물을 우려내고있다. 거실에서 '똑딱 똑닥' 무채 써는 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썰어놓은 무채와 갓을 씻어서 채반에 물기를 빼놓은것까지 합쳐 놓으니 산처럼 양이 많아졌다. 속을 버물기위해 팔 힘 좋은 사위가 소매를 걷었다. 버무려놓은 양념장이 먹음직스럽게 내 코를 자극시킨다.
준비해온 커다란 다라이에 버무린 속을 담는다. 모두 한마음 되어 서로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다정하다. 다같이 모인 가족들과 삶은고기, 겉절이, 막걸리 몇잔으로 점심을 나눠먹고 겨우살이 김장을 마친다.
각 가정에 나눠드릴 김치를 종이팩에 담아 쌓아놓은 그곳에 따스한 온정이 담겨있다. 우리가족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홀몸노인 댁을 제일 먼저 방문했다. 어르신들 얼굴 주름속에 파묻혀버린 긴 세월~날마다 외로운 창가에 새들이 날아와 지저귈때마다 멀리 떠난 자식들 그리움이 촛불처럼 일렁이지만, 기다리는 일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기시는 어르신들이다. 포근한 마음으로 더운 손 얹어주는 어르신들의 어깨위에 잔정이 묻어있다. 따뜻한 포옹으로 "고맙구먼유" 그 말속에는 깊은 사랑의 뜻이 담겨있다.
다음 날 양로원, 장애인협회에 김치를 나눠드린다. 그 다음으로 김장 못한 서울 지인들에게도 택배로 부쳐주었다. 나눠주고도 우리가 먹을 충분한 양의 김치를 냉장 창고에 저장해두면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내년 여름 장마철에 배추가 귀해지면, 우리 일꾼들 밥상에 차려드려야겠다고….
한나절 해가 산마루에 넘어갈 때 쯤 가족들이 아쉬운 발길을 각자 집으로 돌렸다. 찰떡과 머릿고기, 나물등을 손에 쥐어보낸다. 손자들이 훌쩍 떠나버린 허전한 거실을 돌아본다. 따숩게 뎁혀진 구들목에서 작은 설렘으로 차 한잔에 목을 적신다.
코끝이 차가울수록 마음만은 따뜻해지는 산골에서 비울수록 채워지는 작은행복을 느끼는 하루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 생각이 난다. 때때로 김치를 담궈서 보리밥과 함께 독거노인들에게 정성을 다해 대접하셨는데…. 나눔의 의미를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면서 행복해 하셨던 친정 어머니, 지금은 우주 하늘 그 어느곳에서 내 모습을 보시며 "그래 참 잘했다 내 딸아~" 그렇게 빙그레 웃으실것만 같다.
겨울이 깊어 삭정이 황량한 들판에 함박눈이 소복히 쌓이면, 쓸쓸한 길을 따라 걷다가 지난 날 기억속 김장하느라 떠들썩했던 마당을 다시 돌아보리라. 오늘도 해가 서산에 살짝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