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내 어머니

2024.02.04 14:51:52

박주영

시인·수필가

문득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내 어린 시절, 어머니는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복수초와 같았습니다. 그 꽃은 얼어붙은 땅속에서 납작 엎드려 추운 바람을 잘 이겨내지요.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밤새 가래 끓는 소리가 끊기지 않는 어머니 베갯머리에서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개 짖는 소리가 앞산에 컹컹 울려 깨어나 밖을 보니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었어요. 옆에 주무시던 어머니를 찾았으나 방안에도 마당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덜컹거리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밖으로 나갔지요. 산밭에 계실 거라는 예감에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우리 집 개를 앞세웠습니다. 산길은 좁고도 꼬불꼬불했습니다. 앞장서 달려가는 개를 바삐 쫒으며 무서움에 쭈삣 머리끝이 서고, 능선을 기어오를 때 몸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바람 스치는 소리에 뒤를 슬쩍 돌아봤습니다. 보름달은 내가 천천히 걸으면 느리게 따라오고 빨리 걸으면 쏜살같이 내 뒤를 쫒았습니다. 달빛에 희미하게 보이는 어머니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모습이 희끄무레한 게 마치 귀신같아서 섬뜩 놀랄 뻔 했지요.

"어무이, 어무이, 거기 있어?"

"응 여기 있어. 뭣 허러 왔냐 잉?"

목소리를 확인하고도 무서움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큰소리치며 달음박질쳤습니다.

"어무이, 어무이"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안심될 때 쯤 등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황토 흙 묻은 손을 치맛자락에 쓱쓱 털어내며 어머니는 두 팔로 번쩍 나를 안아줬지요.

"무서울 턴디 어떻게 왔냐? 잉"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리 집 개가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어댔습니다.

참깨 밭에서 솎아낸 잡초더미 속에서 이런저런 걱정에 수심이 깊어지면, 밭고랑에 앉아 서늘한 바람으로 근심을 지우시던.

생의 집착이 유별나게 강하셨던 어머니는 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려 무던히 발버둥 치셨지요. 휠 것 같은 허리뼈를 세우고 무릎 연골이 닳도록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어느 날, 자갈투성인 묵정밭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소맷자락을 걷어붙이셨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밭일을 해낼 작정이었지요. 가만히 서 있기도 힘든 산등성이 언덕 밭에서 한 뼘씩 밭을 일구기 위해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습니다. 낮에는 옷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방물장사를 하셨는데, 그 어려운 삶의 고갯길에서 얼마나 힘들었을 까요! 그렇다고 밭을 그냥 내버려두면 쑥대밭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비록 고난을 짊어진 어깨가 힘에 부쳤지만, 다부진 푸른 꿈을 놓지 않았던 당신이셨습니다. 그 뒤 애써 가꾼 농사를 망칠까봐 노심초사 하시며 새벽마다 산밭으로 가시곤 했습니다. 참깨 밭에서 솎아낸 잡초더미 속에서 이런저런 걱정에 수심이 깊어지면, 밭고랑에 앉아 서늘한 바람으로 근심을 지웁니다. 다시 얼굴 내미는 풀들을 뽑아내며 질퍽하게 땀에 젖어 집으로 돌아와서는, 나무토막처럼 쓰러지곤 하셨습니다.

몸에서 진한 땀 냄새가 났지만 식구들의 힘 같은 그 냄새가 싫지 않았습니다. 산 밭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고것들에게 질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잘 가꿔 놓은 우리 밭을 바라보며, 묵묵하고 둥그런 마음 씀씀이가, 마치 후덕한 종갓집 맏며느리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을이 돌아왔습니다. 사각사각 수수 베는 소리가 들리는 밭에서 또 하루를 꼬박 보낸 뒤, 틈나는 대로 떨어진 수수이삭을 줍고 논에 떨어진 벼 이삭을 주우러 다니시던 어머니. 나는 간절하게 휴식을 원했지만 한사코 거절당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먹을 곡식을 버리면 천벌 받는 것이여."

어쩌다가 내가 들꽃을 꺾어다 놓으면 "우리헌테 꽃이 무슨 소용이여! 그거 보고 있으면 밥이 나온다냐?"라고 하셨습니다. 자투리 시간도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오늘따라 달빛까지 아끼시던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습니다. 마음 속에 먼저 떠오르는 둥근 달, 유난히 보름달이 훤한 날에는 습관처럼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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