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말 중에 '관포지교(管鮑之交)'가 있다. 우정에 관한 성어들은 '문경지교', '지란지교', '금석지교', '간담상조' 등과 같이 흔히 비유적 묘사로 구성되는데, '관포지교'는 주인공의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드문 사례로서, 이름만 거론해도 이미 우정이 상징된다는 것이다. 이 성어의 주인공은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이다. 관중이 아직 젊었을 때, 외견상 보면 욕심쟁이, 겁쟁이처럼 보이는 일들을 했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비난할 때마다 포숙아는 관중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두둔하였다. 이에 관중이 탄식하며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아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기원전 700년 무렵, 제나라의 제희공에게는 제아, 규, 소백이라고 하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관중은 공자 규, 포숙아는 소백의 스승이 되었다. 그런데 제아는 제후의 자리에 오른 뒤, 이미 노나라에 시집간 이복 여동생을 불러들여 근친상간을 하는 등, 막장 정치의 끝을 보여주다 사촌인 공손 무지의 패거리에게 살해당하고, 제나라는 더욱 혼란에 빠지니 관중은 공자 규를 모시고 노나라로 도피하고, 포숙아는 공자 소백을 모시고 거나라로 피신하였다. 그 후 공손 무지가 죽자 공자 규와 소백 중 먼저 제나라로 돌아오는 사람이 제나라 주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노나라가 거나라 보다 멀었으므로, 관중은 한 걸음 먼저 달려가 길에서 소백을 만나 형에게 제후 자리를 양보하라고 설득하였는데, 타협이 되지 않자 물러나다 말고 소백을 향해 활을 쏘았다. 이때 소백은 활을 맞지 않았지만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입술을 깨물어 피를 내면서 죽은 체 하였고, 관속에 누운 채 곧장 내달려 제나라에 먼저 도착함으로써 제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춘추시대 다섯 패자의 첫 번째인 제환공이다. 포숙아는 제환공에게 첫 번째 공신이지만 정작 재상의 자리에 관중을 추천하였고, 제환공은 아주 통 크게 관중을 재상으로 기용한다. 그러자 관중은 혼란한 제나라 국정을 단숨에 안정시키고 제나라를 천하의 맹주국가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천재 관중도 늙어 병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제환공이 병문안을 가서 후임을 어떻게 할지 상의하자 자신의 후임으로 일단 포숙아를 추천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포숙아가 워낙 인품이 고매한 사람이라 결국 협잡꾼들을 견뎌내지 못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당시 제환공에게는 역아, 수초, 개방이라 하는 희대의 간신배 3명이 있었는데, 관중은 자신이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으니 문제 삼지 않았지만, 이제 자신이 죽어갈 무렵이 되자 제발 이 세 명 만은 꼭 내치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제환공이 끝내 이들을 내치지 못하자 포숙아는 정말 울화병이 나서 죽어버린다. 그 후 제환공은 이 세 간신배에 의해 궁궐에 감금되어 굶어 죽고 그 시신은 67일이나 방치된다.
사람들은 흔히 포숙아를 예로 들며,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청렴결백, 고매한 인품이 아닐 수 있다고 한다. 이것도 틀린 말은 아니나 관점이 잘못 되었다. 이 사건에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정치인이란 관중처럼 융통성을 가지면서도 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