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예인과 장인들- 자석벼루장 신명식

충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단양서 4대째 가업이어

2009.06.18 20:57:22

예부터 문인들이 서재에서 쓰는 붓(筆) 먹(墨) 종이(紙) 벼루(硯) 네 가지 도구를 문방사우(文房四友) 또는 문방사보(文房四寶), 문방사후(文房四侯)라 불렀다.

이들 네 가지 가운에 먹을 가는 도구인 벼루의 경우 국내에서는 백제·신라 시대에 흙으로 구워 만든 토연(土硯)이 발견될 정도로 오래 전부터 사용됐으며, 도자 기술이 발달한 고려시대에는 유약을 발라 구운 도연인 청자연이 유행할 만큼 문인들이 아끼는 소장품이기도 했다.

벼루는 재질로 볼 때 흙으로 만들되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토연(土煙), 흙으로 만들고 유약까지 발라 구워 낸 도연(陶硯), 돌로 만든 석연(石硯), 쇠로 만든 철연(鐵硯), 옥돌로 만든 옥연(玉硯), 나무로 만든 목연(木硯)이 많고 때로는 전연(塼硯), 와연(瓦硯), 니연(泥硯), 상아연(象牙硯), 골연(骨硯), 목심칠연(木心漆硯)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 진 것들도 있다.

충북 무형문화재 벼루장인 신명식씨가 사군자, 십장생, 연꽃, 용 등의 문양을 새겨 넣고 있다.

국내 석연(石硯)의 경우 함경도 두만강변 종성의 종성석, 평안북도 위원의 위원석, 평안남도 대동강 녹석, 황해도 장연의 장연석과 오창석, 경기도 파주의 파주회초석과 회청석, 강원도 평창의 자석, 정선의 수마노석, 전남 해남의 옥석, 충북 단양의 단양석, 진천의 회청석 등이 그 이름을 떨쳐왔다.

충북 단양은 삼국시대에는 적산현(赤山縣), 고려시대에는 단산현(丹山縣)으로 불렸을 정도로 색깔이 붉은 돌(자석:紫石)이 풍부했던 지역이다.

단양의 자석벼루가 언제부터 사용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백제시대에 쌓은 경기도 이천의 설봉산성에서 '함통7년(867년)'이란 문구가 새겨진 자석벼루가 발견된 것으로 봐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자석벼루를 애용했던 것이 틀림없다.

벼루장 신명식씨는 일본인들이 단양에서 잠시 찾아냈던 자석(붉은돌) 광맥을 다시 찾아내 국내 유일하게 자석 벼루를 만들고 있다.

특히 고려 말 이숭인은 단양 적성의 자석벼루를 써 본 뒤 '도은선생시집'에서 "벼루의 결은 살과 같이 부드러워 숫돌과 다르고 / 연지 주변 석안점은 꽃이나 별 같구나 / 붓에 먹을 적셔 조충자를 써 보고 / 능엄경을 흉내내니 문득 한 편의 사경이 되었구나"라고 칭찬할 정도로 단양 자석벼루에 흠뻑 빠졌었다.

이런 단양 자석벼루를 되살려 내고 4대째 가업으로 이어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이자 노동부 지정 '전통벼루 부분 기능 전승자·계승자'인 석천(石泉) 신명식(申明植·55)씨다.

신씨는 충남 보령군에서 태어났는데 이 보령군 지역은 질 좋은 오석(烏石 : 까만 돌)이 많이 나기 때문에 남포벼루(藍浦硯)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신씨의 할아버지 신철휴 역시 그곳에서 태어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비였으나 자신이 사용할 벼루를 만들다 벼루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하게 됐다.

신씨의 아버지 신경득 역시 부친의 기법과 기술을 전수받아 평생 벼루제작에 열과 성을 다 받쳤다.

자석 원석은 표면에 선을 긋고 모탕과 박톱을 이용해 알맞은 크기로 잘라낸 뒤 다시 앞 뒤 면을 잘라 두께를 조절한다.

신씨 역시 이런 부친을 도우며 자연스럽게 벼루 만드는 일을 익혀갔는데 어느 날 부친으로부터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충북 단양에서 붉은 색 질 좋은 벼룻돌 광석을 발견하고는 나를 포함한 충남 보령의 벼루 기술자 여러 명을 단양으로 징용 데려가 벼루 만드는 일을 시켰었다"라는 얘기를 듣게 됐다.

이에 신씨는 형제들과 함께 단양으로 가서 자석(紫石) 광산을 찾아 헤메다가 일제시대 종이와 새끼줄로 포장한 돌덩이를 지게로 운반했다는 가곡면 향산리 노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향산리 일대 산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일제시대 때 원석을 채취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망치와 정을 발견하고는 주변을 탐색해 마침내 자석(紫石) 광맥을 찾아내고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자석 광업권 등록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1972년에 현재의 작업장과 집과 전수관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 하리로 이사해 정착한 뒤 지금까지 자석벼루 만드는 외길을 걸어왔다.

단양 자석벼루가 1개가 탄생하기까지 보통 7~10일 정도 걸린다.

광산에서 원석이 들어오면 신씨는 다른 색의 입자가 섞이지 않은 선명한 자색(紫色)을 띄고 있고, 망치로 두드려 봐서 둔탁하지 않고 청아한 소리를 내는 돌을 골라낸다.

신명식씨가 칼날과 정으로 원석 바닥을 평평하게 깎는 평미리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좋은 돌이 골라지면 표면에 자를 만큼 선을 긋고 모탕과 박톱을 이용해 잘라낸 뒤 앞 뒤 면을 다시 잘라 두께를 조절한다.

그리고는 작두칼과 정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제거하는 '걷목치기'를 하고, 이어 칼날과 정으로 평평하게 다듬는 '평미리' 과정을 거친다.

그런 다음 체질한 고운 강모래를 뿌린 뒤 모탕돌로 면을 갈아내고, 작은 정으로 물집(연지: 硯池)과 연당 등을 파낸다.

이어 조각용 정으로 용, 사군자, 십장생 등을 조각한 뒤 사포로 매끈하게 다듬는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먹이 갈리는 부분(연당)에 사포를 이용해 꺼끌꺼끌한 결을 세우는 '봉망세우기'를 하는데 이것이 벼루 제작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기술이다.

너무 거칠게 봉망을 세우면 먹이 거칠게 갈려 먹물이 죽처럼 걸죽하게 되고, 바닥면에 너무 곱게 봉망을 세우면 먹이 갈리지 않기 때문이다.

벼루에 연지, 연당 등을 만들고 각종 문양 조각을 마치면 마지막으로 불에 달군 뒤 광택을 내는 마무리 작업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광내기 작업을 하는 데, 벼루를 불에 적당히 달군 뒤 자석 원색을 살릴 수 있는 약품을 발라 말린 다음 솔로 표면을 문질러 광택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손으로 직접 모든 공정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사군자나 십장생의 경우 작업실에서 10여일 정도 꼬박 작업해야 할 정도로 섬세한 손길을 주어야 한다.

이렇게 신씨가 만드는 단양 영춘자석벼루는 원석이 부드럽고 단단하여 먹이 곱게 갈리며 찌꺼기가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먹물에 윤택이 흐르고 강도가 높아 쉽게 닳지 않아 오래도록 보관·사용할 수 있으며 은은한 자주색으로 기품을 보여 최고의 벼루로 평가된다.

이 단양 자석벼루는 정착 이듬해인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서 퇴직하는 교육 공무원들에게 대통령 하사품으로 주문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서예하는 사람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소장하는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당시 신씨는 매년 1800개 정도씩 정부에 납품했는데 이런 퇴직 선물용 납품은 1990년대 초부터 끊겼다.

또한 단양 자석벼루는 중국산 값싼 벼루가 나오기 전까지는 일본 등지로 해마다 15만~20만 달러 어치나 수출하는 등 인기가 좋았었다.

신씨는 자신의 분신인 단양 자석벼루를 홍보하기 위해 1987년부터 미국 LA, 일본 홋가이도, 대전 엑스포 등 국내외에서 전시회 및 제작 시연을 여러 차례 가졌다.

자석양각연지문, 자석양각송학문

단양 영춘자석벼루는 먹이 잘 갈리고 색감도 좋지만 신씨의 명품 조각으로 소장용 작품은 수백만원씩 호가한다.

그런 신씨의 노력과 기술이 인정을 받아 1992년에 전국 제2녹색지대 민속공예품 품평회에서 국무총리상을, 1999년에는 관광공예품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2000년에 충청북도 공예품 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데 이어 2006년 노동부로부터 전통 벼루 부문 기능 전승자로, 2008년에는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벼루장으로 지정됐다.

이처럼 훌륭한 단양 자석벼루도 지금은 중국산 유사제품에 밀리고 수출이 막히고, 내수도 부진해 겨우 식구들이 먹고 사는 정도로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신씨는 자석벼루가 대한민국 벼루를 대표하는 명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그 명맥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신념하에 1999년부터는 외 아들 재민(31)씨에게 4대째 가업을 잇기 위한 도제식 강습을 하고 있다.

단양 영춘자석벼루는 보통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20만원부터 있지만, 연지문벼루 같은 소장용 작품은 수백만원씩 한다.

/박종천기자

자료제공: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주소 :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 343-1
문의전화 : (043) 423-7071, 010-5122-3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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