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1960·70년대 플라스틱과 양은 그릇이 나오기 전까지 서민들은 사기 그릇을 많이 사용했다.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워낸 '막사발'같은 것들이다.
고려시대에 귀족들은 청자를 썼고,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방짜유기같은 금속 그릇을 썼지만 서민들은 값싼 사기그릇, 질그릇, 오지그릇에 모든 음식을 담고 보관했던 것이다.
흙으로 만든 다음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것은 투박한 질그릇이고, 광명단이란 검붉은 유약을 발라 구워내면 된장독같은 오지그릇이 되고, 투명한 유약을 발라 구우면 하얀 바탕색의 사기그릇이 되는 것이다.
서동규씨가 느릅나무재 유약으로 개발, 특허등록까지 마친 녹자 그릇들은 청와대에서 쓸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사기그릇 만드는 일을 3대째 하면서 명품으로 잘 만드는 이가 충북 단양에 있다.
지난 2000년 도자기 분야에서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대한민국 도예 명장'(제28호)에 선정됐고, 2002년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제10호)로 지정된 방곡(傍谷) 서동규(徐東圭·71)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서씨는 사기그릇을 발전시켜 독특하게 '녹자'라는 사기그릇을 만들어 내고 특허도 냈다.
이 서씨의 녹자들은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 시절 청와대로 납품돼 식기로 사용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서씨가 터를 잡고 작품들을 만들고 있는 곳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의 '방곡도예원'이다.
단양에 들어서서 물길 옆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59번 국도를 달리면 유명한 단양8경 가운데 5개 즉, 구담봉과 옥순봉, 선암계곡의 상선암·중선암·하선암을 볼 수 있다.
단양군 단성면에 있는 이 절경들을 지나면 조선시대 김홍도가 열흘이나 바라보아도 그림으로 옮길 수 없어 1년 후에야 그림으로 그렸다는 사인암을 지나면 대강면으로 들어서는데 이 대강면의 첩첩산골에 방곡도예촌이 있다.
예부터 도공들이 밀집해 있던 방곡리에 단양군이 도자기 집성촌을 만들어 지금도 5개의 가마가 그릇을 만들고 있다.
방곡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항상 먹을거리가 풍부해서 뒷방에 음식물을 가득 쌓아 두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상도의 산으로 남아있는 황정산을 바라보고 앉은 방곡마을에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600년 역사를 지닌 조선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밭에서 돌보다 더 많이 나오는 백자 사금파리들, 그리고 구점, 아랫점, 웃점, 옛장터,사기점 등의 지명은 방곡마을 그릇 역사의 흔적들이다.
이 마을은 월악산과 소백산 두 국립공원을 남북으로 벌재와 도락산 빗재에 감싸여 있다.
단양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려면 '그릇을 빗는 고개'라는 빗재를 넘어야 하는 데 이 빗재에 서면 억겁의 세월이 빗은 화강암 봉우리들의 수려한 자태가 사방으로 펼쳐진다.
◇ 마사토와 소나무 많은 방곡은 도예 최적지
평생을 그릇만드는 일에 몰두하여 대한민국 도예 명장과 충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방곡 서동규씨.
이 화강암이 풍화된 모래성분의 흙에 진흙 성분이 섞이면 단단한 그릇을 얻을 수 있는 '사토'가 되고 화강암 성분을 고스란히 간직하면 '물토'가 된다.
사토에 점도가 높은 흙을 보태면 그릇의 뼈가 되는 '소지'가 되고, 물토에 재를 섞으면 그릇의 살인 묵보래 즉, 유약이 된다.
이 마을은 이렇듯 흙(마사토)과 가마에 불을 때는 소나무가 많아서 사기그릇 제작의 최적지가 되었다.
황정산에는 조선조에 세운 황장금표가 지금도 서 있을 정도로 인근의 산에 질 좋은 소나무가 지천이었다고 한다.
일제가 놋그릇을 징발해가던 1930~40년대에는 이 마을 최고의 호황기였다.
그릇을 사가려는 보부상들이 20~30명씩 몰려들었고, 그릇을 만드는 집이 여럿 있었는데 각 집마다 한 끼 밥을 하기 위해 쌀 한 가마씩 씻어야 했고, 마을 주막은 유성기의 노랫 소리가 끊기지 않을 정도로 흥청됐다.
이 처럼 마을 전체가 그릇 만드는 집들이었을 때 서씨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 그릇만드는 일을 배우고 그것에 청춘을 바쳤다.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소나무 껍질을 먹으며 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지게에 날랐고, 가마를 만든 흙이 도자기 흙과 같은 것이어서 도자기를 굽기 위해 불을 때면 같은 온도에서 가마까지 녹아 내려 가마를 수없이 다시 만들기도 했다.
만든 그릇을 산더미처럼 지게에 얹어 서울까지 가서 팔아봤고, 하루 천개의 사발을 만들 정도로 힘겨운 노동도 하면서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
그러나 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할 되면서 사기그릇이 양은 그릇, 플라스틱 등에 밀리면서 점점 쇠퇴하여 그릇만드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가마를 버리고 외지로 나갔다.
결국은 홀로 남아 가마를 지키던 서씨도 1994년 큰 홍수로 마을 전체와 함께 큰 피해를 입었고, 그 때 시찰나온 도지사에게 부탁해 예전의 도예촌을 다시 세웠다.
그러자 도공들이 하나 둘씩 다시 이 마을로 들어와 한 때는 10집이 그릇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다시 5곳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예전 도예촌의 명성을 열심히 이어가고 있다.
서씨는 '녹자'를 개발해 특허까지 냈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마을에서는 화강암이 부서진 마사토를 물에 걸러 앙금을 가라앉힌 사토로 도자기를 빚는데 이 흙은 1200~1300℃에 녹는 백토와 달리 1500~2000℃에서야 녹는다.
이 흙을 이용하면 백토로 만든 그릇보다 훨씬 단단하고 맑은 소리를 내는 그릇을 만들 수 있다.
녹자는 이런 사토로 빚은 그릇에 느릅나무 재로 만든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다.
느릅나무는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독이 없으며 위궤양, 위염, 위하수 등 각종 위장 질환에도 효과적고, 부은 것을 가라앉히고 불면증에 효과가 좋다고 알려진 약재이다.
◇ 느릅나무 유약으로 녹자 개발
방곡도예촌에서는 마사토로 자기를 구워 1500~2000℃의 고온에서 구워 더욱 단단하고 맑은 소리가 나는 그릇을 만든다.
서씨는 "꼬실꼬실해진 느릅나무 재를 물에 풀면 철분이 남아요. 그것을 초벌한 자기에 발라 가마에 넣고 10시간쯤 불을 때면 그릇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반짝이죠. 그때부터 아래 불을 멈추고 옆구리 쪽으로 화력 좋은 소나무 장작을 때 가마 안 온도를 최대한 높여줘요. 그리고 불을 위쪽으로 한 칸씩 옮겨가며 때면서 가마 안 온도를 맞춰요"라고 녹자 제작과정을 설명한다.
이렇게 만든 녹자는 갈색으로 일률적으로 발색되는 종래의 도자기와는 달리 청자와 백자의 중간쯤되는 황록색을 띈다.
서씨는 "녹자는 미세기공과 점토로 만든 용기 특유의 원적외선 방사가 커서 탁한 물을 부어도 정수 효과가 뛰어나고 카페인과 알코올 성분을 낮춰주기도 한다"며 "녹자 항아리를 김치 독으로 사용하면 김치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고 오래도록 싱싱한 맛을 느낄 수 있고, 쌀을 담으면 벌레도 안 생기고 세제 없이 물로만 씻어도 기름기가 싹 가신다"고 녹자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한다.
이 녹자는 성철 스님을 비롯해 전국 몇 곳의 유명사찰에서 써보고, 알음알음 소문듣고 찾아와 구입해간 지역 인사들이 극찬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녹자 탄생에 대해 서씨는 "오로지 이 땅에서 나는 흙과 이 땅에서 자란 소나무 불길이 이런 그릇을 빗어 낼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조선초부터 내려온 가마를 사기그릇 쇠락기 때에도 버리지 않고 지켜온 서동규씨.
또한 서씨는 5년 전부터 도자기 만드는 흙으로 우리나라 천일염을 감싸 가마에 위쪽에서 구워낸 소금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사토에 싸여 1300℃ 정도에서 15시간 이상 구워진 소금은 암발생 물질 등 유해성분은 모두 날아가고 짠맛도 덜한 맛좋고 유익한 소금으로 변한다.
서씨의 이 '방곡도염'은 노무현 대통령 때부터 지금까지 청와대에 들어가고 있다.
지금 서씨 가마 옆에는 문화재청과 충북도, 단양군이 함께 지원해서 만드는 도예전수관 공사가 한창이다.
12월 10일쯤 완공되면 "전 국민이 몸에 좋은 우리 그릇을 쓰는 시대가 됐으면 좋겠다"던 서씨가 평소 하고 싶었던 일반인 상대로 하는 도예 강의, 도예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종천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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