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색

2024.07.18 14:25:24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새벽에 일어난 엄마가 밥을 달라고 깨운다. 간단히 국에 밥을 말아 드리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센터에 언제 가느냐고 자꾸 물어봐서 아직 멀었다는 대답만 여러 번 하고 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문을 닫는 소리에 내려와 보니 나무 아래 의자에 앉은 엄마가 보인다. 큰 나무가 천천히 내리는 비를 막아줘서 다행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아침, 흐린 날씨에도 선명한 노란색 승합차가 보인다. 승합차 발판을 천천히 밟고 오르는 엄마 등 뒤에서 인사를 한다. 비가 와서 그런지 감정이 뒤섞이며, 삼십여 년 전의 나와 만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일하면서 첫 아이는 친정엄마가 많이 돌봐주고 도움을 주셨다. 둘째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18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맡겼다. 18개월 된 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농로로 걸어오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영원히 이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슬펐다. 아직은 엄마 품에서 키워야 하는 아들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보내는 게 내키지 않았고, 우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는 마음도 편치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익숙해졌고, 주변에 시골 풍경이 정겨운 어린이집을 5년이나 다녔다. 둘째 아이반 선생님을 아파트 주민으로 마주쳤을 때는 반갑기도 하고 그때의 고마움이 떠올랐다. 집에 와서 아이와 선생님이 밝게 웃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 기억은 또렷해졌다. 마을 길을 미끄러지듯이 들어오는 노란색 버스가 보이면 아이는 손을 흔든다. 나는 노란색 버스가 마을 어귀로 사라질 때까지 멈춰서 바라본다. 노란색 버스를 기다리고 아이를 태워 보내면서 늘 기도했던 것은 '하루를 잘 지냈으면'하는 바람뿐이었다.

노란색 버스에 친정엄마를 태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유치원 아이를 둔 부모의 자리에 서 있다. 처음엔 가기 싫다고 어깃장을 놓더니 시간과 날짜도 모르고 기다린다. 아침에는 일어나는 시간과 상관없이 밥 먹고 양치하면 1층으로 내려가도 되냐고 묻는다. 가지 않는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종일 좌불안석으로 거실을 오가다가 작은방으로 들어가 눕는다.

'노인 유치원'이라는 말이 찰떡으로 들어맞는다. 어릴 때 아이들과 친정엄마가 타는 버스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시각적으로 눈에 띈다. 요즘 아이와 노인이 돌봄의 대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이를 씻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히듯 엄마의 머리를 감기고 옷을 내드린다. 남동생을 졸라 파마한 머리를 곱게 빗고 무거워 보이는 목걸이를 걸고 단장을 한다.

노란색에 대한 느낌이 사뭇 달라졌다. 엄마 일도 그렇지만 10년 전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사건을 겪은 후부터 슬픔이 보인다. 부모의 심정으로 지켜본 그 일은 유가족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비통했다. 색이 지닌 감정이 일상의 경험으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된 순간이었다. 노란 리본이 물결을 이루고 애도를 표하던 사람들과 매년 4월을 잊지 않고 떠올린다. 공예 수업을 하면서 노란색 리본을 사용할 때 머뭇거리며 '슬픔과 위로의 색'이 되었다.

엄마를 태운 노란 승합차가 멀어진다. 엄마가 쓰러져서 누워계시던 한 달 동안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버스를 탄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엄마의 노란색은 행복한 기다림이고, 나는 그래서 위로를 받는 색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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