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길따라

2024.03.21 15:17:36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좋은 날이다. 바람은 잔잔하고 하늘은 맑고 푸르러 가만히 서 있어도 봄 햇살이 쏟아진다. 꽃은 얼마나 피었으려나? 지인 여럿이 차 한 대를 빌려 광양 매화 축제에 가는 날이다. 여의치 않아서 함께 가지는 못했지만 마음은 이미 그들이 탄 차에 올라탔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언니가 있다. 몇 년 전에 함께 간 제주도에서는 동백꽃이 절정인 시기를 지나서 아쉬워하며, 꽃 필 때 꼭 오자는 말을 남겼다. 무덤덤하고 둔감한 편인 나와는 달리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에 민감하다. 강하게 보이는 모습 뒤로 숨겨진 감성을 엿본다. 꽃 얘기를 할 때면 얼굴이 화사해지고 꽃구경 가자고 들썩인다.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매화를 보러 가자고 여행 동지를 모으더니 길을 떠났다.

점심을 먹고 교수님 몇 분과 가볍게 산책을 했다. 지난해부터 대학교 학부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올해는 수업 요일이 같다보니 친분을 쌓을 기회가 많아졌다. 교수님 한 분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작은 연못이 보인다. '이런 좋은 곳이 있다니 몰랐다며' 저마다 한마디씩 거든다. 노란색으로 가지마다 점을 찍은 산수유도 보이고, 솜털처럼 보송한 목련꽃망울도 보인다. 매화를 보러 가지 못한 아쉬움이 사라진다. 꽃구경이 한창인데 휴대전화 진동음이 울린다. 서해 수호 기념일에 낭송해 달라는 전화다.

잊고 있었다. 따스한 봄이 되어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에 머무는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떠올린다.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에서 서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한 쉰 다선 분의 용사를 기리는 서해 수호의 날은 3월 넷째 주 금요일이다. 열아홉 살, 스무 살, 스물한 살…. 어린 아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부모는 어찌 살았을까? 국가의 부름에 응한 아들이 바다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이별을 마주한 부모의 마음은 짐작으로도 먹먹해진다. 몇 년 전 둘째 아들이 해병대를 지원하고 제대하기까지 노심초사하던 마음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6월, 연평도 앞바다에는 총성이 울렸다. 참수리 357호 대원들이 감내했던 그 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연평해전'을 보면서 숨죽여 울던 기억이 선명하다. 누군가의 남편이자 연인으로 또는 든든한 아들로 평범한 일상을 꿈꾸던 그들이 사랑하는 전우와 가족,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분초를 다투던 숭고한 희생 앞에 숙연해진다. 당시 조타실에서 실종되어 나중에 인양되신 조타장 故 한상국 상사님은 발견 당시 손이 조타키에 묶여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몸에는 총알과 파편이 박히고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에서 오로지 사명감으로 버틴 젊은 용사가 지킨 바다는 고요하다. 살아남은 전우들은 그들대로 '살아있어 미안하다'라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들이 고통을 조금 더 내려놓기를 바랄 뿐이다.

봄이 오면 피고 지는 꽃을 보며 자연의 아름다운 순간을 누린다. 일상의 행복이 감사함으로 차오른다. 꽃따라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바다에 닿는다. 바다에 가라앉은 청춘의 꽃, 해마다 3월이면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묵직한 돌덩이 건져 올려 기억해야 한다. 꽃보다 아름다웠던 그들의 젊음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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