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人 위로

산소편지

2023.06.01 17:59:23

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농부가 심었다. 토질이 좋고 나쁨을 평하지 않았고, 왜 그곳이냐고 자리를 논하지 않았다. 숙명인 양 주어진 땅을 의지하여 토양이 주는 대로 양분을 받아먹고 조심 조심히 싹을 틔웠다. 어느 날 농부가 칭찬하며 쓰다듬자, 감격하여 더 조심히 작은 공을 형성했다. 접동새가 지나다 말랑말랑 연초록 공의 탄생을 축복하자, 감격하여 보름달처럼 크고 둥글어지는 꿈을 꾸었다. 햇볕을 벗 삼아 씨앗을 여물게 했고, 줄무늬 패션으로 장식하며 몸을 불리니 바람이 지나며 단단해지게 도와주었다. 감격하고 감격하며 조심히 자라서, 달고 시원한 극상품 수박이 되어 농부를 웃게 했다.

그뿐이다. 수박이 뭐라 했기에 수박, 수박, 하는가. 수박은 말하지 않는다.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툭하면 수박을 소환한다. 달고 시원하다는 말은 쏙 빼고 부정적인 의미로만 쓴다. 일을 건성건성 하여 못마땅할 때 쓰는 ‘수박 겉핥기’란 말만 해도 그렇다. 겉만 핥으면 참외도 사과도 포도도 속 맛을 모르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그런데 사과 겉핥는다, 참외 겉핥는다, 하지 않고 수박만 가지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겉과 속살 색깔이 다르다면서 수박을 깨부수고 짓밟기도 한다. 사과 표면이 붉으나 속살은 하얗고, 샛노란 참외도 속살은 하얗다. 복숭아도 포도도 멜론도 겉과 속 색깔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박만 가지고서 화풀이를 한다.

초록과 빨강, 색깔이 극적이어서일까. 빨강과 하양의 사과, 노랑과 상아색 바나나, 핑크와 하양의 복숭아, 겉과 속 색깔 다름이 그들보다 극적이기는 하구나. 한 사람이 혀를 내밀고 주먹만 한 사과나 복숭아 겉만 핥고 있는 상상을 해보자. 에이! 머리통보다 큰 수박을 핥아야 극적이지 말이다. 그렇구나. 다른 과일보다 크고, 겉과 속 색깔이 선명해서 불려 나가는구나. 그렇구나. 세상사 인간사 고만고만해야 살만하거늘, 나보다 잘나고 많이 알고 많이 가졌다? 생각이 나와 다른 것도 마땅찮은데 선명하기까지 하다? 속 맛이 참 달다고? 뭔 상관, 겉만 잘근잘근해도 힐링인걸….

수박이 되어보셨는가? 스스로 수박이라 생각한 적 없건만, 수박으로 산 적이 있다. 날이 새는 것이 두려웠다. 밤도 두려운 것이 “너 먼저 가면 죽어!” 하는 그 애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와 표정, 강한 눈빛이 천장에 귓가에 아른거렸다. 매일 아침 그 애 집 앞에 앉아 학교 늦을까 봐 조바심하며 그 애를 기다렸다. 하루는 지각이 너무 싫어서 먼저 갔는데, 그 대가로 수박이 되었다. 그 애를 중심으로 여럿이 나를 둘러싸고 내 마음을 밟고 으깼다. 겁에 질려 눈을 내리 깠는데, 눈물 날 것 같아 내리 깠는데, 그런 내 속도 모르고, 겉 표정만 보고 센 척 잘난 척한다며 공격했다. 티 없어야 할 얼굴에 음산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고 싶었다. 어른들께는 절대 비밀이란 약속을 받고 중학생 언니에게 토로했고, 언니 도움으로 그럭저럭 지나갔다.

36년이 흐른 뒤,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 중 한 친구를 만났다. 암자의 주지 스님이 된 그에게 왜 그랬냐고 물어보았다. 표상이었단다. 공부 잘하고 예쁘고 선생님이 알아주어서 부러웠다는 거다. 너무 놀랐다. 나를 부러워했다니…. 나는 늘 자신감이 없고 부끄러운 아이였다. 얼마나 소심하고 부끄러워했으면 통신표마다 자신감 없고 부끄러워한다고 쓰셨을까. 예쁘기는커녕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젊은 엄마가 단장해서 보내는 아이들과 달리, 늦둥이 막내인 나는 할머니 엄마 패션이라 옷도 머리 스타일도 추레했다. 욕설도 용기더라. 나는 도무지 욕설이 안 나오는데, 거침없이 욕설을 뱉는 그 애가 두려워 끌려다녔다. 나는 싸울 용기조차 없는 아이였다.

수박人이여, 감사하라. 표상이란 말뜻도 몰랐는데 글쎄 표상이었단다. 표상은 억울함이다. 미움받는 대가를 치러야 해서다. 나처럼 수박이라 생각한 적 없기에 수박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도 따지지 말라. 수박은 남이 정한다. 조심히 성실히 내 길을 갈 뿐인데 왜 수박이냐고 항변 말라. 그대 죄목은 나와 다름이다. 속 맛은 외면하고 겉만 보고 그대를 폄훼해도 진심을 말하려 애쓰지 말고 견디시라. 모두 함께 웃는 날이 오리니. 덤으로 그대가 부러웠다는 말도 들을 수 있을 것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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