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의 끝

산소편지

2020.01.09 17:26:22

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한 사진동호회 전시회에서 '충북의 사라져가는 것들'이란 주제문장에 시선이 머문다. 뭉클했다. 사라져간다는 문장하나에 감정에 파문이 일다니…. 내게도 못내 놓아지지 않는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일게다. 내게 그리움은 무얼까. 늘 있으나 없는 것, 모양도 형체도 없으나 너무나 또렷한 실체, 만져지지 않으나 그 말만으로도 영혼의 팔레트가 펼쳐지는 아릿한 것, 내게 그리움은 그런 것들이다.

그리움의 끝에는 사람이 있다. 그 끝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은, 이미 놓인 물건 위에 무엇인가를 또 놓는 일이요, 꼬리를 물고 나온 기억들을 포개는 일이다. 비가 오면 우산도 없이 뼛속까지 젖도록 비를 맞으며 강변을 걷던 젊은 날의 치기를 찻잔에 얹고 커피를 마신다. 눈이 오면 눈싸움하던 어린 시절을 건반위에 올려놓고 피아노를 친다. 어느덧 정서는 팽창한 현이 되어 천상을 날고, 이미 길어 놓여 진 기억의 실타래에 투명한 현상들이 건반에 포개지며 그리운 이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손님처럼 한가로움이 주어지면 산책을 한다. 그런 날은 잠시 머물다간 풍경임에도 내내 그 속을 떠나지 못하던 곳을 향하여 페달을 밟는다. 어깨에 닿는 햇살위에 운동화를 비집고 간질이는 덤불의 감촉을 얹고 걷는다. 잘록한 허리처럼 굽었던 그길 위로 여지없이 떠오르는 내 고향 오솔길이 포개진다. 그리고 그 애 얼굴이 오버랩 된다. 엄마 심부름 가던 조붓한 그 길에서 볼이 빨갛던 그 애를 만났었지.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나를 보고는 급히 달아나는 바람에 나도 놀랐지…. 어딘가에서 나처럼 나이 들어가고 있을 그 소년을 그렇게 만나곤 한다.

자주 가는 그 찻집에는 오래된 풍금이 있다. 전설처럼 놓인 풍금을 볼 때마다 음악수업을 마친 옆 교실에서 풍금을 운반해오던 남자아이들이 겹쳐진다. 엘피판위로 미끄러지는 선율에 개미떼처럼 풍금에 매달려 총총 움직이던 풍경을 얹으면 건반에서 춤추던 선생님 손가락이 포개진다. 그런 날은 찻집에 머무는 내내 정서에 달이 뜬다. 그리고 마주앉은 이들 미소에도, 말소리에도 선생님 노래 소리가 겹쳐진다.

독일 '켈하임'에 갔을 때였다. 도나우 강이 흐르는 그곳에서 아침 일찍 잠이 깼었다. 약간정도 결핍의 정서를 즐기며 호텔주변을 산책했다. 그때, 뎅그렁뎅그렁 예배당 종이 울리는 게 아닌가.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종을 친단다. 종소리가 싫으면 그곳에 살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소음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저 소리, 아직도 꿈결에 있는 종소리를 이국땅에서 들으며 걷자니 그 소리에 내 고향 교회종탑이 포개졌다. 그리고 종탑아래서 공깃돌 놀이하던 어릴 적 친구를 만났다.

불현듯 그리움의 끝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며 추억의 장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표랑의식에 조응하며 추억에 화답하는 파란 물빛 시詩를 써보며 걸어 볼까나…. 그런데 가르마처럼 조붓한 오솔길이 사라졌다. 얼굴 붉히며 달아나던 소년을 만났던 그곳엔 군수창고가 들어와 있었다. 금강을 뒤로하고 서있는 예배당은 리모델링하여 옛 모습이 아니었다. 아직도 꿈결에는 종소리가 있는데 종탑이 사라졌다. 강변에서 주워온 공깃돌들을 종탑아래 풀어 놓고 온종일 놀던 목사님 딸 은주는 어디로 갔을까. 선생님 노래 소리는 생생한데 풍금소리 퍼지던 학교 교실은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동화 속의 집처럼 새로 지은 강당에는 피아노가 놓여있다. 잔디사이로 둥글게 난 시멘트 길로 꼬마들이 롤러스케이트를 밀며 재잘재잘 추억을 쓰고 있었다.

시간이 끝이 없듯 그리움도 끝이 없다. 그리움 끝에 있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은 행복이다. 호수를 그리워하는 날은, 감싸 안은 채 늘어서 있는 산에 그 고요함이 겹쳐지면서 젊은 날 호숫가를 거닐던 사람을 만난다. 산을 보면 산만큼이나 부풀어 오른 마음에 계곡과 폭포가 포개지면서 함께 산을 오르던 사람을 만난다. 흘러가게 둔 추억들은 얼마나 야성적인가. 사라졌으나 늘 있는 나의 추억들은 정제되지 않은 순수다. 그리움의 간격을 두고 기억의 봄을 뜯으며 사람을 만나는 일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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