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을 부를 때

산소편지

2020.07.09 20:00:11

임미옥

청주시1인1책 프로그램 강사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던 밤에'를 애청하며 팝송과 발라드를 즐겼는데 언제부터인지 슬그머니 뽕짝노래가 좋아져버린 나는 시니어그룹에 속한다. 그날도 시니어 프로 '황금연못'을 보려고 티브이를 켰다. "저는 72세고 거기는 60세라고 들었거든요? 제가 먼저니까 그쪽이 이름 좀 바꿨으면 좋겠네요!" 시니어 출연자들이 앉아 있는 좌석 중앙에서 얼굴이 가름한 할머니가 느닷없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박장대소가 터진다. 그 분 앞에 놓인 명패에는 '최순실' 이라고 쓰여 있다. 이 장면은 '최순실' 씨가 전 국민에게 알려지던 때에 이름을 주제로 나갔던 장면이다. 코로나19로 시니어 출연자들이 방송국에 모일 수 없다보니 요즘은 방영한 장면 중 인기장면들을 골라서 앙코르로 보여준다. 당시 진행자가 그 분을 향하여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시냐고 장난 섞인 질문을 했었고, 그 질문에 재치 있게 답을 한 거다.

동명 이름 때문에 고민했던 일이 생각났다. 28년간 나의 딸로 살았던 시간만 묶어 둔 채 딸이 떠났을 때, 그 허전함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몸으로 익힌 일처럼 끈질긴 것도 없나보다. 습관처럼 딸 방을 들여다보는 일이 한동안 계속됐었다. 세월에 익혀지지 않는 것도 없나보다. 딸과 살았던 추억들이 그리움이란 또 다른 술로 익어 갈 무렵, 딸은 솜털이 보송보송한 사내 아기를 안고 산후조리를 하러 왔다. 강보를 풀어헤치니 분홍 얼굴에 주름이 조글조글한 작디작은 인형이 꿈틀하더니 몸을 있는 대로 뒤틀면서 기지개를 켠다. 눈물이 난다. 아기가 아기를 낳다니….

양가에서 아기 이름 짓기에 들어갔다. 사돈댁에서도 직계가족이 그룹 카톡 방을 만들어 공모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쪽도 딸 내외, 아들 내외, 우리부부가 그룹 카톡 방을 만들어 공모했다. 딸 내외는 양쪽에 다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각자 이름을 내놓으면 누군가 토를 단다. 이 이름은 이래서 마땅찮고, 저 이름은 저래서 마땅찮고 결정 못하는 이유가 많기도 하다. 딸은 직업이 교사다 보니 거명되는 이름마다 스쳐간 아이들 중 동명이 있었다는데, 하필 부정적인 면이 연상된다며 아웃시킨다.

"지나치게 비약하는 거 아니니? 범죄자와 이름이 같다 해서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니잖니?" 시간이 흘러도 이름을 못 짓자, 내가 이렇게 말했지만 소용없다. 그러던 어느 날, 이쪽저쪽 그룹 톡에 거론된 이름들 중 투표를 하여 한 이름이 결정되었다. 아뿔싸! 그 이름은 내가 젊은 날 유치원에 근무할 때 극한 애를 먹였던 아이랑 동명이라 누락되기를 은근히 바랐던 이름 아닌가. 딸에게 비약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결정되고 보니 정작 내 머릿속에 그 아이가 자꾸 떠오르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람이 태어나 어떤 삶을 살다 가느냐의 질을 결정하는데 이름 영향이 정말 있을까. 있다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희대의 신출귀몰 탈옥수 신창원이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었다. 당시 남편은 법원에서 호적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지방 도시임에도 그와 동명인들이 개명 신청을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 건 있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신창원'이든 '최순실'이든 잘된 사람이 왜 없겠나. 같은 이름 신창원, 최순실로 살지만 범죄자로 유명한가 하면, 사회나 국가에 유익을 주는 인물도 분명 있을 게다. 하지만 수만 번, 수십 만 번 불려 질 이름이다보니 고민은 된다. 세계역사의 획을 그었다 해서 자녀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을 사람이 누가 있겠나.



생각해보니 손자이름과 동명인 그 아이는 축복하며 이름 불러줄 부모가 없었다. 손자를 부를 때 기도하며 부르기로 했다. 많은 사람을 먹이고 거두는 사람이 되어라 하며 '승훈아!' 하고 부른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자리에 앉으라며 '승훈아!' 한다. 바다처럼 품 넓은 사람이 되라며 '승훈아!' 하기도 한다. 이길 승勝, 공 훈勳, 전쟁 같은 세상에서 나태하고 싶은 자신을 이기고, 죄의 유혹을 이기어 사업이나 나라를 위하여 두드러지게 공을 세우라는 의미다. 부를수록 정이 간다. 이렇게 축복하는 마음을 담아 수천 번 수만 번 부르다 보면 돌덩이도 감동시키고 말 것이다.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