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결' - 구자승·장지원 부부 화백 아틀리에

두 화백의 닮은 듯 다른 길

2017.09.07 18:00:44

구자승 화백의 작품 '여인의 초상'

[충북일보] 벽에 걸린 액자 속 여인에 사로잡힌다. 옆모습이 참으로 단아하다. 캔버스 속 여인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침묵을 풀고 환한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져 핀을 꽂고 잔잔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 그녀의 두 손은 포개어 무릎 위에 놓고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다. 입을 앙다문 표정에선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작품 '여인의 초상'은 마치 눈앞에 사람이 앉아 있는 듯 착시를 일으킨다.

인상 깊었던 또 하나의 작품은 '다리미가 있는 정물'이다. 봉오리가 벌어지는 꽃 한 송이가 꽂힌 녹색 꽃병과 낡은 다리미와 접힌 미색의 레이스 보자기, 레몬과 체리 당구 볼이 고가구 위에 놓여 있다. 어떤 형식 없이 소품을 탁자에 올려놓은 것 같지만, 그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 있는 듯싶다. 특히 녹색 병에 얼비친 레몬과 보자기에서 화백의 섬세한 감각에 놀란다. 캔버스에 그린 소품 하나하나가 실물처럼 느껴져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순간 벗과 제자들의 설득과 간청을 뿌리치고 독배를 받아 드는 소크라테스의 그 생생한 장면,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그의 정물화도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처럼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인간의 삶의 애환을, 생(生)의 구김살을 다리미란 소재를 놓아 새롭게 탄생한다. 특별한 모습, 병에 꽂힌 아리따운 꽃 한 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보자기처럼 모든 것을 품는 물상도 없다. 인생사 보기 좋은 것도 보기 싫은 것도 겪어내야만 한다. 보자기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걸 품는다. 일상을 살아감에 보자기의 심성을 지닌다면, 세상사 힘겨울 것이 없다고 그림은 말을 거는 듯싶다.

구자승(왼쪽), 장지원 화백

두 작품의 주인은 한국사실주의의 거장, 구자승 화백이다. 구상미술의 심도와 격조를 높였다고 평가를 받는 분이시다. 안목이 낮은 내가 그림을 본다는 건, 보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다. 오감을 거쳐 온 사유의 심상을 이야기로 펼쳐 놓는다. 형과 색, 구성이 어떻다는 건 미술평론가의 몫이다. 현재 나의 시선엔 그의 그림이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듯 실물로 느껴진다. 여백을 염두에 둔 구도와 감성적 색감이 편안하고, 소소한 소재가 이끄는 정물 속으로 이끈다. 화백의 말대로 동양적 사유의 공간, 여백의 힘인가 보다.

저택의 정경도 미(美)를 창조하는 화가의 삶과 어울린다. 마침 비가 내린 날이라 멀리 보이는 충주 앙성면 남한강 줄기는 운치가 넘친다. 화백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집안에 들어놓은 것이 탁월하다. 더불어 백지 위에 스케치하듯 정원 한쪽에 녹음 짙은 자작나무와 세월의 더께가 앉은 비너스 상까지 예술가의 면모를 확인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저택 풍경에 함께 간 지인들의 감탄이 이어진다.

구자승 화백의 작업실

부부는 저택을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기다린 듯 반갑게 맞이한다. 칠십이 넘은 노부부 얼굴은 청아함 그 자체이다. 두 분의 목소리 또한 독특하다. 구 화백은 울림이 깊은 목소리의 성우 같고, 장 화백은 세월을 초월한 발랄하고 앳된 목소리의 소녀 같은 모습이다. 지인께서 안주인이 살림의 고수라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역시나 그렇다. 그림을 그리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집안 인테리어나 작은 소품들까지 주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놀라운 건, 소박한 여인상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조각의 거장 권진규 조각가. 그의 작품 중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수록된 '지원의 얼굴', 그 '지원'이 장지원 화백이란다.


복도를 경계로 둔 두 화백의 아틀리에가 궁금하다. 왼쪽 구 화백의 화실은 약간 어두운 분위기다. 이곳이 바로 한국 사실주의 최고의 초상화와 정물화를 그린 장소이다. 크고 작은 작품이 정면에 여러 점 걸려 있고, 캔버스가 바닥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다. 반면에 장지원 화백의 화실은 미술 관련 수많은 서적과 작품, 소품들의 전시장인 듯 볼거리가 많다. 바닥에는 대작을 그리는 듯 어수선하다. 사각쟁반에 담긴 무수한 몽당연필을 발견한다. 그녀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한마디로 대변하는 사물이다.

장지원 화백의 작업실 모습

장지원 화백의 작품은 몽환적이다. 우선 소재는 나무와 꽃, 새와 집 등을 주로 선택한다. 화백은 삼십 년간 같은 제목 '숨겨진 차원'에서 무엇을 꿈꾸는가. 시선에 든 작품은 캔버스 중심에 한 아름 꽃이 핀 나무이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바치는 특별한 꽃다발 같다. 덩치 큰 나무는 여간하여 큰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이라는 정신적 지주를 품고, 정겨운 이웃인 아리따운 새들이 제집인 양 날아든다. 멀리 작디작은 오두막집도 보인다. 세파에 지친 육신을 이끌고 돌아갈 집과 기다리는 사랑하는 그대가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랴. 더없이 평안한 나날이 되리라.

장지원의 화백의 작품 '숨겨진 차원'

장 화백의 그림은 오감을 일깨운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거칠고 차가운 표면에 따사로운 정이 흐르는 듯하다. 꽃이 아름드리 핀 꽃나무를 보고 있으면 달려가 안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화가는 물감에다 생명의 에너지를 어떻게 불어넣었을까. 아마도 그녀의 늙지 않는 예술혼과 이웃을 향한 기도 덕분이리라. 그녀는 밝고 아름다운 생명력 넘치는 그림을 위하여, 지인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기도를 수시로 올린단다. 아틀리에 창가 기도의 자리가 그 증거이다.

두 화백은 닮은 듯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두 화백이다. 구 화백은 일상의 소재로 동양적 정서가 흥건히 배여 있다. 장 화백은 심상을 여과하여 화폭에 담아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아름다움을 누리는 건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두 분의 미적 향유와 태도로 우리의 정서는 순화되고 행복한 기운을 얻는다. 화백은 "예술혼은 늙지 않고 영글어간다."고 했던가. 늙지 않고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길 원한다. 충북에 이토록 훌륭한 부부 화백이 머문다는 것이 참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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