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결' - 천 년의 미소로 답하자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충북도유형문화재 113호)

2017.01.05 17:39:15

5월의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신록의 계절 오월, 정오 즈음에 보았던 천 년의 미소가 아니다. 초록이 무성하던 나무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으리라. 그날 마애불의 미소는 천진한 소년처럼 싱그럽게 다가왔던 것 같다. 석불은 금방이라도 짓궂은 표정으로 변할 듯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동살에 비친 마애불좌상의 미소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계절이 바뀌어 석불 뒤편으로 나목이 드문드문 보이고, 나무에 미처 잎을 떨구지 못한 마른 갈잎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애불에 비친 동살은 노을빛을 머금은 듯 자애로운 미소로 나의 지친 심신을 자분자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가.

빈 절터만 찾아 만행하던 이지누 작가가 말했던가. 그는 계절과 시간에 따라 석불의 미소가 다르고, 그 느낌도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작가는 일부러 동살이 트는 새벽이나 해가 질 무렵 산 중턱에 올라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를 보았단다. 대부분 삼존불의 미소를 자애로운 미소로 칭하지만, 그는 마애불의 미소가 매우 근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고 말하여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과연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직접 경험하고 싶어 마음에 적어두었던 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주말 날씨를 미리 챙겨 정하동 마애불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래, 그의 말이 맞는 것이 성싶다. 봄날에 느꼈던 풋풋한 미소년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운 미소도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머니의 품에서 느꼈던 따스함이랄까. 아니 엄마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한없이 바라보던 온화한 미소같이 느껴져 더욱 좋다. 마애불에서 풍기는 미감과 미소가 계절마다 시각마다 다름을 이제야 깨닫는다.
청주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아쉽게도 이마 중앙에 뚫린 채 구멍이 나 백호는 사라지고, 콧등과 왼쪽 눈은 누군가 일부러 깨트려 부순 것 같은 상태이다. 그나마 바위산에 돌출된 판석형 자연암반에 선각 된 마애불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라고 하지만,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머리에는 둥근 형태의 두광이 표현되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모자를 쓴 비로사나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자연 지석을 이용한 듯 하단의 약간 돌출된 부분에 연화 대좌를 조각한 것도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자태로 유려한 조각수법이 돋보이는 문화재다. 조각양식이 통일신라 하대의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천 년의 미소가 충북 문화유산으로 남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산 중에 최고봉이 비로봉이듯, 비로불은 최상위 부처님이다. 정하동 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수인이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으로 잡은 지권인을 결하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나타낸다. 비로자나불은 산스크리트로 '태양'이고,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로 자비 광명이 우주 법계에 가득히 충만하다는 뜻이다. 불지(佛智)의 광대무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華嚴宗)의 본존불(本尊佛)이다. 괴산 각연사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청주 청화사 고려 초기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청주 안심사의 비로전과 동화사 대웅전 내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이 중원에 화엄종 사상이 퍼져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어느 나그네의 염원.

비로자나불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본다. 석불 앞에는 개울이 무심히 흐르고, 그 위에 다리도 놓여 있다. 아마도 이곳에 연화교가 있지 않았냐는 상상도 해본다. 뒤편에는 숲이 우거지고 주변을 둘러봐도 어디에도 법당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학자는 서까래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나, 산을 등지고 마애불좌상만 덩그러니 서 있다. 비로자나불은 법당 안에 자리할 본존불이 아닌가. 그런데 자연 지형인 바위에 조각한 마애불이다.

후인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비로자나불이 번듯한 전각 하나 없이 흙먼지 풀풀거리는 도롯가에 자리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중생에게 자비광명을 비추고자 바위에 석불을 새긴 장인의 염원은 기록과 말을 전하지 않아도 알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한쪽 눈이 외눈박이처럼 깨지고 부서져 상처 입었으나, 석불의 표정은 자애로운 미소 그 자체이다. 주변 풍경이 변하고 전각이 흔적 없이 사라졌어도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피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일도 많고 탈도 많은 한 해가 저물고 새해 첫 주를 맞는다. 국민은 변함없이 주말마다 거리로 나와 평화로운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어수선한 정국에 삶의 지친 시장 상인과 조류인플루엔자(AI)로 망연자실한 축산 농가 어르신들의 침울한 얼굴이 뉴스에 비친다. 세상사 가시 돋친 말들에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 울음조차 삼키기 어려운 현실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늠할 수 없어 답답하지만, 희망을 잃지 말자.

고통과 아픔이 있어야 성장한다고 했던가. 지난해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터져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나, 각자 평소와 다름없이 묵묵히 일하고 있다. 생활에 지친 무심한 얼굴이 아닌 천 년의 미소로 답하자. 때론 풋풋한 미소년의 장난기 어린 미소도 필요하리라. 현재의 삶이 미래의 역사로 남아 각인되기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한 해 한 해 쌓여 우리의 문화와 역사도 탄탄해지리라 믿는다. 삶이 힘겨워도 상처를 딛고 울음조차 삼키는 속 깊은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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