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결' - 진천 농다리

만남과 헤어짐의 장이자 그리움 키우는 경계점

2015.10.01 19:49:33

진천 농다리 앞 신록

물가에 홀로 누운 버드나무가 외로워 보인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박았으나 가지 끝은 물에 닿아 있다.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 것일까. 나무는 애초 물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고향이 그리운 것 같다. 아니면 돌다리를 건너가 돌아오지 않는 이를 목 놓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저기 삼삼오오 다리를 건너는 가족과 연인이 부러운 것이다.

문득 만인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차마 사랑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교감. 순정한 만남이자 이별이 있는 이야기, 황순원의 소설「소나기」이다. 주인공인 산골 소년과 윤 초시네 증손녀가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징검다리가 아닌가. 그리 보면, 돌다리는 향수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슬픈 사랑 이야기를 엮는 매개체가 된 장소. 소녀가 물장난 치던 곳이자, 소년이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며 소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곳이다. 소녀는 잔망스럽게도 자신의 흙탕물 얼룩진 옷을 함께 묻어달라고 했단다. 소녀의 유언으로 가슴 저린 이야기로 승화되고, 무구한 세월이 흘러도 회자되는 작품이다.

진천 농다리 앞 푸르른 신록

다리에 얽힌 기분 좋은 착각이 한두 번이랴. 이몽룡과 성춘향이 만났던 광한루원의 오작교에서도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내 뒤에 재촉하는 지인만 아니면 돌다리에서 한나절을 나고도 모자랐으리라. 돌다리 아래 호수에 그네를 탄 아리따운 춘향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선남선녀의 만남이 마치 만인의 연인인 양 가슴을 얼마나 두근거리게 했던가.

그 시절에는 어디를 나서든 온전히 제 발로 땅을 밟고 걸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강물이나 허공에 놓은 다리는 더없이 소중하고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누군가 넘실거리는 내를 건너지 못하여 애타는 심정을 헤아려 주위에 널린 돌들을 주워와 쌓은 것이 돌다리일 성싶다.

사실 내 고장에도 옛 모습 그대로 천 년 신화의 다리가 존재한다. 돌다리를 지척에 두고 차일피일 미루다, 남도에서 절절히 그리워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탐진강 돌다리를 건너며 이내 내 가슴은 불화살을 맞은 듯 뜨거워진다. 주말을 애써 기다려 그 기운이 스러지기 전에 그곳으로 달려간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충북 진천 농다리. 돌다리는 수려한 산수와 잘 어우러져 보는 이마다 감탄이 절로 흐른다. 눈길 닿는 곳마다 천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돌다리는 요란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지극히 소박하나 정교하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걸음을 떠받치고 온갖 풍상을 견뎌온 다리라 여기니, 더없이 대단하고 애잔한 눈빛으로 보인다.

마치 낙석을 쌓은 돌탑에 서까래 같은 돌로 이어놓은 듯하다. 돌의 빛깔과 약간의 휘어짐이 여느 다리와 다르다. 다리의 근간이 된 재료도 마을에서 쉽게 볼 수 있고 밟히는 자색의 돌이다. 정자에 올라 다리를 품은 세금천을 바라보니 정녕 '거대한 지네가 몸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형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온갖 풍파에도 온전한 모습으로 유지하고 있었던 비결은 휘어짐에 있었단다. 부드러운 곡선의 힘이다. 물의 흐름과 물살에 대한 저항을 고려한 선인의 지혜에 놀랍다.

탐진강 돌다리를 건너고 되돌아본다. 이 고장에서 출토된 돌로 만든 다리는 아닌듯하다. 시간의 흐름으로 풍화로 닳아진 것이 아닌 네모 반듯이 자른 듯 돌 표면이 매끈하다.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농다리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다리에 담은 의미는 비슷하리라 본다. 강 언저리에 수질정화 생태 습지원과 돌다리, 옛 모습을 재현하려는 주민의 의지와 옛 정서가 드러나 훈훈하다.

돌다리는 내 마음 기슭에 묻힌 잃어버린 향수를 열게 한 실마리다. 소녀가 기다릴 것 같아 소년이 달음박질하여 찾아간 장소가 징검다리다. 우리네 부모가 나뭇짐이나 채소를 지게에 지고 읍내로 팔러 갔다가 허정허정 돌아온 길목도, 하늘로 돌아간 당신을 목 놓아 기다리며 서성이던 곳도 다리 부근일 게다.

진천 농다리 풍경

어찌 보면, 다리는 소통의 길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자태만으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의 장이자, 그리움을 키우는 경계점이기도 하다. 다리로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정을 낳고 인연을 맺는다. 다리는 내가 하늘로 돌아가도 길이 남을 우리 삶의 산증인이다.

저물녘 농다리 냇가에 서면 승천하지 못한 커다란 지네가 물비늘을 푸르르 털며 산속으로 스르르 사라질 것만 같다. 저기 사라진 길로 영영 돌아간 소녀도 소년을 부르며 돌아올 것만 같지 않은가. 이 땅에 숨탄것들은 죽음을 기반으로 탄생하며, 그 순환은 영겁을 통하여 회귀된다고 한다. 수백 수천 일이 지났으니, 못다 이룬 사랑의 꽃을 피울 차례가 멀지 않은 성싶다.

물가를 서성이는 버드나무와 돌다리가 그리운 추억을 부른다. 그대가 만약 다리를 건넌다면, 나도 주저 없이 따라나서리라. 메마른 가슴에 단비처럼 순정한 기억을 퍼 올려준 돌다리, 저 길은 나에게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이은희 작가 약력

충북 청주출생, 충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월간문학』등단,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2007년 제물포수필문학상, 2010년 충북수필문학상, 2012년 신곡문학상 본상, 2013년 충북여성문학상과 제4회 민들레수필문학상 본상 수상. 2013년 국립청주박물관 사진공모전 금상 수상, 2015년 김우종문학상 본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검댕이', '망새', '버선코', '생각이 돌다', '결'

수필선집 '전설의 벽'출간.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편집장,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현) 계간 '수필세계', '에세이문예' 연재수필 집필 중, (주)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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