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결' - 무심천 연가

2016.04.07 18:02:34

벚꽃과 개나리가 어우러진 무심천 다리위

봄은 약속이나 한 양 어김없이 천변으로 돌아왔다. 그를 목메어 기다린 사람도 없건만, 한사코 돌아와 우리를 반긴다. 꽃들이 꽃망울을 거침없이 터트리고 있다는 건, 천변이 주가를 올릴 날도 머지않았다는 증거이다. 발 없는 말은 꽃 소식을 달동네 아무개에게도 알리고 말리라. 사람들은 머지않아 꽃구경을 핑계로 이름난 일탈을 주도하리라. 모두 제 발로 달려와 듣기 좋은 말로 천변을 마구 흔들어댈 것이다.

매체에선 연일 아래 지방에 봄꽃이 구름같이 피었다고 알린다. 내 고장 무심천 언저리에도 벚꽃과 개나리가 흐드러졌다. 그들이 손짓하는 곳으로 가지 못 하는 사람들은 '천변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느라 전화통에 불이 나리라. 나도 덩달아 휩쓸린다. 천변에 가족과 직장 동료, 연인일 것 같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솜사탕 파는 아저씨도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꽃이 피고 지는 내내 인산인해(人山人海), 아니 인천인해(人川人海)가 되리라.

무심천 산책길을 걷는 시민들

천변엔 종일 봄꽃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대리라. 밤낮없이 문전성시다. 그러나 사람들은 벚나무 아래서 만개한 꽃만 탐할 뿐, 정작 하천의 유구한 역사의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일상을 토로할 뿐이다. 만약 천이 귀를 열었다면 서운할 터이다. 잠시라도 무심천이 들려주는 무언의 소리를 귀 기울여야 할 것 같다.

하천의 예전 모습은 정녕 옛이야기로 사라진 것일까. 꼬마들이 가재 잡고 물장구치던 정겨웠던 놀이를 젊은 세대가 알 턱이 있으랴. 방학이면, 시내 일원 학생들 손에는 낫 한 자루씩을 들고 천변으로 모여든다. 여름내 무성히 자란 풀을 베는 행사가 이루어진다. 그 행사는 우리 손으로 태풍과 장마를 대비한 일이기도 하다. 공부가 우선인 요즘 아이들에겐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만약 예전처럼 풀 베는 일을 하라면, 학생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다. 그 시절엔 친구 집 모내기도 자처하고 하천 풀베기 봉사도 노닐며 하였던 것 같다. 자연스레 자연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시절이다.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삼십 도를 오락가락하는 염천에 허리쯤 자란 풀을 베는 일은 친구들과 함께하여 어렵지 않았다. 학교마다 풀 베는 구역을 배정받아 풀베기하며 '누가 먼저 풀을 빨리 베나.' 내기했던 것도 같다. 밭에서 돌아온 농부의 옷에서 풍기는 땀내가 날 정도로 열중하였다. 일을 끝내고 학교 앞에서 즐겨 먹던 '냉면과 고로케'는 또 얼마나 꿀맛이었던가. 모기란 놈에게 헌혈하면서도 웃음이 넘쳐나던 그 시절, 우리의 마음은 자연을 닮아 순수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다.

무심천은 고장의 젖줄이다. 천을 경계로 구를 나뉜다. 사람들은 대부분 구를 넘지 않으려는 안주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심 중심에 난 천이니 일을 보려면 넘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돌아보면, 천은 우리 생활 깊숙이 밀접하게 존재한다. 장마 들어 물이 차는 날 빼고는 천에 걸친 징검다리를 건너거나, 자동차로 천변의 다리를 수없이 오간다.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코 지났다고 말하나 수백 날 보아 온 익숙한 풍경이니 어찌 정이 들지 않겠는가. 천변의 하상도로로 하루의 시작과 마감을 짓는 사람이 다수이다. 무심천은 시민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삶의 애환과 문화를 뿌리내린다. 또한, 철새가 노닐고 백로가 한가로이 졸음 우는 곳이자 동식물의 터전이다. 생명을 키우고 생활에 소중한 공간이니 젖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천에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본다. 저 물결처럼 내 마음도 세파에 무시로 흔들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안에 순연한 감성을 부른다. 천에 흐르는 물결처럼,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가만가만히 말을 건넨다. 무언의 말로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지치고 팍팍한 내 삶의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이 느낌을 어찌 계절이 주는 풍경 탓이라고 말할까.

천변 하상도로로 십수 년 출퇴근한 적도 있다.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아 물안개가 피어오르던 날도, 대지에 새싹이 돋는 신록의 봄도, 졸가리만 남아 바람에 휩쓸리는 억새의 군무를 즐기는 겨울도, 그 나름의 멋이 있다. 무심천의 사계는 알게 모르게 삶의 희로애락을 위무하며 함께한 것이다. 긴 세월 간절한 마음을 품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왔기 때문일까. 무심천은 위안과 치유의 힘이 서려 있다. 부질없는 욕망을 가슴에 품고 들볶다가 천변에 서면, 마음의 빗장이 쉬이 풀려 빈 마음으로 돌아간 적이 한두 번인가. 어느 절에 무심천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차지하고 나의 정서를 관장하고 있다.

무심천 수양버들과 개나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던가. 머지않아 천변 도로에 꽃비가 하염없이 내리리라. 봄꽃들이 화르르 피었다가 허무하게 스러지듯 우리네 한생도 마찬가지니라. 이제 봄의 장막도 천변의 짧은 인기도 막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년 이맘때 꽃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덧없지만은 않다. 계절이 주는 하천의 그윽한 풍경과 이곳에서 쌓은 추억과 온정은 그리움의 잔영으로 남아 무시로 가슴의 현을 건드릴 것이다.

무심천은 일상처럼 내 안에 존재한다. 꽃이 스러진 뒤 천 주변은 검푸른 빛으로 출렁일 것이다. 벚나무는 천을 스쳐온 바람과 합류하여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리라.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하천을 중심으로 일상은 계속되리라. 물길에 노을빛이 내려앉아 윤슬이 부드럽게 반짝인다. 사람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진 듯하다. 귀가를 서둘고자 무심천 대교를 넘나든다. 하지만, 무심천은 우리네 분주한 일상과 다르게 무심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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