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준팔이

2014.11.25 13:49:23

방광호

청석고등학교 교사

정거좌애풍림만 상엽홍어이월화(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은 <산행(山行)>이란 시에서 '늦 단풍이 하 좋아 수레 멈추고 바라보니,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붉구나'라고 노래하였다. 올 가을에도 벌써 몇 차례나 그 구절을 읊조리며 단풍의 아름다움을 확인하였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이나 잎과 가지로 그늘 무성한 여름, 눈 덮인 겨울 산의 산행 땐 또 마음이 바뀌곤 하지만 말이다. 하긴 계절마다, 갈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은 그래서 싫증이 나지 않는다.

11월 2일의 내변산 산행에서 저물어가는 단풍으로 눈호강을 하고 돌아와 달콤한 잠에 빠져 늦잠을 즐기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동물농장'이란 프로를 방영 중이었다. 편안한 기분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가 나는 금방 빠져들었다.

서울 강남의 한 동물병원 앞에서 '좋은 곳으로 보내 달라'는 쪽지와 함께 발견된 '준팔이'란 이름의 고양이 얘기였다. 준팔이는 주인에게 버려진 후 동물보호소에서 무려 3개월간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 증세를 보이며 모든 행동을 접어버렸다. 당연히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눈에는 생기가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사랑하는 임에게 버림받거나 큰 상처를 입어 자포자기한 인간의 모습과 다름없어 보였다.

제작진은 미국의 저명한 고양이 스트레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흔히 볼 수 없는 준팔이의 증상은 상실감과 불안으로 인한 우울증 증세로, 주인을 되찾아줘야만 섭식이 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어떤 사정에 의해 고양이를 버렸는지 모르지만 전 주인 또한 고양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었음에 틀림없어 보였다. 이름도 자식처럼 사람 이름으로 지어주었고, 그 준팔이가 그토록 상심에 빠져 제 삶을 포기할 정도의 절망상태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동물보호소 측에서는 준팔이를 애정으로 돌보아 줄 입양자를 찾았다. 배다혜라는 가수가 입양을 자처하며 나섰다. '피치 못해 버린 사람도 있지만 모두가 버린 것은 아니며, 함께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사랑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약 2주간 눈물과 애정으로 보듬어주자 생기를 되찾은 준팔이가 서서히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왔다. '준팔아~!'하고 부르며 내민 손에 제 앞발을 넌지시 건네주는 고양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침내 먹이 앞으로 다가가는 기적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상실감과 그리움, 체념 따위의 고귀한 감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사실 또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백하지만 나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눈물을 자주 흘리는 편이다. 아내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있지만, 코끝에서 '찡' 소리가 나거나 눈이 시큼해지며 흐르는 그것을 나는 억제하기가 쉽지 않다.

어제는 깊어가는 가을의 단풍으로, 오늘은 또 삶의 의욕을 되찾은 준팔이를 통해서 뜨거운 감동을 만나는 나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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