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님과 라면

2014.04.01 14:36:31

방광호

청석고등학교 교사

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세상 참 어지럽다. 이런 때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백골부대 GOP에서 근무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행정병을 대동하고 지형정찰을 나갔던 중대장님께서 본부로 가는 길목에 있던 우리 소대에 들르셨다.

나는 왠지 막연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가슴 속에 괴어오름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라면을 끓여 달란다는 주문이다. 소대장 당번을 맡고 있던 후임병이 마침 휴가 중이었고, ROTC 출신이었던 소대장이 나에게 임시 당번병을 맡겼던 때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밥은 물론 반찬 하나 변변히 만들 줄 아는 것이 없어 후임들의 도움을 받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살얼음판을 딛고 지내던 참이었다.

불행히도 그 날은 도와줄 후임도 없었고 며칠 계속된 장맛비로 마른 나뭇가지조차 없었다. 젖은 나무에서 나는 연기가 눈을 사정없이 후벼댔다. 소대장이 재촉하는 소리에 쫓겨 정신없이 라면을 삶아 소대장실로 들여보냈다. 설익었을 것이 당연한 라면이 들어가고 오래잖아 그대로 되나왔다. 소대장이 눈총을 쏘아대는 사이, 중대장님께서 라면에 대한 질책 한 마디 없이 워커를 신고 계시는 모습을 부엌에 몸을 숨기고 바라보았다. 민망함과 죄송한 마음이 가슴을 훑었다.

장교치곤 좀 작은 키에 얼굴까지 까무잡잡해서 시골 아저씨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분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복종심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분이기도 했다. 보급품이 아주 열악했던 그 시절에 좀 더 잘 먹이지 못하고, 좀 더 잘 입히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마치 부모님이나 형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소대장들은 물론 모든 사병들이 하나같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분께 작은 보답이나마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었다. 빗속에서 헤매다 한기(寒氣)와 함께 돌아오면서 따끈한 국물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으랴· 군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라면 한 그릇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공감하리라. 특히 겨울밤 외곽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내무반에서 반합에 끓여 먹는 그 비교할 수 없는 맛이란!

그날따라 터무니없이 작아보이던 그 분이 중대 본부 막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나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다시 또 그런 기회가 있을까싶지 않았지만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라면을 끓여내어 그 분께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런 기회를 끝내 갖지 못한 채 FEBA(남방한계선 이남지역)로 내려와 그 분과 이별을 해야 했다. 육군본부로 전출명령이 나셨기 때문이다.

떠나시던 날, 도열했던 장교와 부사관, 사병 할 것 없이 참담한 심정이 되어 훌쩍거렸다. 유난히 장난이 심했던 한 소대장이 코맹맹이 소리로 '중대장님, 중대장님!'을 외쳐대며 아이처럼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자,

"소대장, 울지 마랏! 장교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병사들이 누굴 믿고…!"

하며 짐짓 고함을 질렀지만 그분도 끝내 말을 잇지는 못하였다. 중대장님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생소한 얼굴들이 온갖 곳에서 불쑥불쑥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 오는 요즈음 나는 그 분이 더욱 자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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