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기에 우리에게 필수적인 예방조치는 손 씻기와 마스크였습니다.
특히 손 씻기는 코로나 이전 메르스가 왔을 때도 아주 중요한 예방수단이었습니다. 당시 손소독제가 부족하여 사재기소동이 일어났던 것은 코로나시기 마스크와 같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단한 손 씻기도 19세기 전까지는 중요한 위생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나 희생되었어도 공공위생에 관한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다만 과학의 발달로 인체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질병연구도 활발하여 의사에 대한 권위도 높아지고 연구와 치료가 이루어지는 대형 종합병원도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이던 1840년대 당시 최고 수준인 오스트리아 빈종합병원에 30 중반의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란 헝가리출신의사가 산부인과 부과장으로 승진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하였지만 사실확인을 끝까지 해야 하는 집요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때 산부인과의 가장 큰 문제는 산모들이 출산 후 산욕열로 사망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는 점입니다. 1841년에서 1846년까지 2만 명 이상 신생아를 출산하였는데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가 10명당 1명에 이르렀습니다. 건강하게 들어왔던 산모들이 환경이 좋은 병원에서 출산 후 사망하게 되니 큰 고민이었습니다. 오히려 환경이 좋지 않은 자기 집에서 산파 도움으로 출산하는 경우가 병원출산보다 생존율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권위가 높아 자존심이 센 의사들은 그러한 원인에 대해서는 따져보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막연한 추측을 내놓을 뿐이었습니다.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진 의사들은 산모인 여성에게서만 원인을 찾으려 했습니다.
임신초기 몸에 꽉 죄는 코르셋을 입어 자궁압박으로 배설물이 나오질 않고 혈관 속으로 들어간다든지 개인의 체질 탓이라든지 출산직후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한 발열이라는 등 병원에서의 높은 사망률에 대한 현상과 원인에 대하여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해부학을 가르치는 제멜바이스의 은사가 수업시간에 손가락을 다쳤는데 그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은사가 보인 증세가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와 똑같은 증상임을 알게 되었고, 바로 그는 부검하는 시신에 있는 세균을 의사가 산모에게 옮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의 큰 병원은 해부학 연구에 주력하였으나 해부한 뒤의 처리는 소홀히 하였습니다. 제멜바이스의 병원도 그곳에서 사망한 환자와 함께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들의 시신도 모두 해부를 하였으나 뒤처리는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즉시 해부한 후에는 손을 씻고 염소로 소독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1년 내에 사망률을 1%로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병원에서는 그의 이론을 무시하고 그런 파괴적 질병을 단순한 손 씻기로 근절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의사들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제멜바이스는 잇단 의사들의 비난으로 정신적 타격을 받고 끝내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된 지 2주일 만에 그 역시 세균감염으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결국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에 의하여 세균감염이라는 이론의 정당성이 입증되기까지는 한참 지난 뒤였습니다. 현재 제멜바이스의 이론대로 의사들은 충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1965년에는 헝가리에 있는 부다페스트의과대학이 그의 이름을 따서 제멜바이스의과대학으로 바꾸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딴 '제멜바이스 반사작용'이라는 용어도 나왔습니다. 그것은 기존 신념이나 관습에 반하는 새로운 정보나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 합리적 검토없이 즉각 거부하는 인간의 심리적 작용을 말한다고 합니다.
간단하지만 대단한 발견을 하였으나 불운한 생을 살아간 사람이 제멜바이스 한 사람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