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곡식들을 다 익게 하여 어지간히 가을걷이를 마친, 텅 빈 들판과 가을빛이 여유로운 장수, 진안을 거쳐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지나는 길에 바라보는 산들이 한가롭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은 것인가. 언제부턴가 봄이 되면 벚꽃놀이, 가을 되면 단풍놀이 가고 싶다. 입동 지나고 날씨가 좀 쌀쌀한 늦가을에 내장산과 백양사를 다녀왔다. 고등학교 때 다녀오고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내장산의 풍경을 바라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내장산 초입부터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들이 하나 둘 흩날리는 풍경이 참으로 절창이다. 삶의 절정이란 이런 것일까. 늦가을 단풍에 나도 흠뻑 취해 떨어진 낙엽 밟으며 아내가 사준 따끈한 국화빵을 먹으며 천천히 발걸음 옮긴다. 늦가을인데, 내장산 오르는 길, 사람들이 참 많다. 길을 걷다가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떨어진 단풍에 누워 하늘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곱게 물든 단풍잎, 차곡차곡 책 갈피에 넣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스마트폰으로 가을을 전송하기도 한다.
내장산 풍경.
ⓒ양선규
내장산 밤바람에 속절없이 붉어지는 얼굴, 오늘이 천천히 가도 좋고 빨리 가도 좋다 하네. 눈부시게 물든 오색 단풍, 살비듬 털듯 바람에 흩날리고 백양사 비자나무숲 깨우는 맑은 아침 햇살, 내 마음도 한 장 얇은 낙엽처럼 가볍다
나무들의 몸과 함께했던 꽃샘추위, 화사하게 꽃피우던 봄, 여름 장마를 지난 짙은 녹음, 가을밤 찬 바람과 무서리에 물든 단풍, 이제 훌훌 옷을 벗고 한가로이 동안거에 들고 있다. 겨울로 가고 있다. 천천히 옮기는 그 발걸음 처연하고 장엄하다.
<자작 시, 「늦가을」 전문>
나이 들수록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어쩌면 우리의 삶도 저 늦가을 나무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등화가친(燈火可親), 일엽지추(一葉知秋)라 했던가. 등화가친은 등불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말로 책을 읽거나 학문을 탐구하기에 좋다는 뜻으로 서늘한 가을밤은 등불을 가까이하여 글 읽기 좋다는 뜻이다. 일엽지추는 하나의 나뭇잎을 보고 가을이 오고 있다는 말로 작은 일을 가지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다.
저물어 가는 들녘,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와 댓잎,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는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도 가을바람 소리가 난다. 서걱이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댓잎 소리가 난다. 어쩌면 늦가을은 가을과 겨울의 길목에서 새로운 봄을 그리워하는 플랫폼 같은 계절은 아닐까. 그래서 늦가을은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둠과 서늘한 추위를 지나 따뜻함이 그리운, 그래서 봄을 연상하게 하는 계절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알베르 카뮈(1913~1960)는 "늦가을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라고 했다. 늦가을은 우리에게 새로운 목표를 새우고, 좀 더 새로운 것에 다가가게 하며 모험을 떠나게 하는 계절이라고 하였다." 늦가을, 많은 사람들이 새순이 돋는 봄을 연상케 하는 계절이라 말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