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달 항아리가 좋다

2024.04.23 14:43:22

양선규

시인·화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멈춰 서서 지금까지 달려온 길을 뒤돌아 본다고 한다. 거침없이 빠른 속도로 앞만 보고 달려온 길고 긴 삶의 여정, 내 영혼이 함께 따라왔는지 뒤처져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란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일 중독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않은 채 목표만 앞세워 살아왔는지 모른다. 필자도 오랜 세월 교단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를 하고 틈날 때마다 내 전공을 살려 그림을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시를 쓰면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지만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마음 숨길 수 없다. 오랜 세월 직장에서 습관처럼 몸에 밴 일 때문일 것이다.

직장을 은퇴했는데도 학기말고사가 끝나갈 무렵, 학년별 수행 평가를 끝내지 못해 크게 걱정을 하다가 꿈에서 깰 때가 있다. 참으로 아찔한 꿈이다. 시험이 끝나면 방학전까지 수행평가와 이론 시험을 합산해 성적이 나와야 하는데, 두 가지 이상의 수행 평가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뒤돌아 보면 평가는 아주 민감한 사항이기도 하며 현직에 있을 때 학교 일정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 꿈 이야기다.
퇴직 후 아내가 해왔던 가정 살림 중 일부는 내가 맡아서 하고 있는데, 일도 해본 사람이 한다고 막상 집안일을 해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시절, 아내가 은행을 다니면서 육아를 할 때 가정 살림을 많이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아침 먹고 차 한잔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무량산이나 용두봉, 금강 둘레길 등의 길을 걷고 있는데, 하루 일과 중 몸과 마음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마음의 여유와 건강을 위해 다른 일은 좀 미루더라도 부지런히 잘 하고 있는 일 중의 하나다.

전업 작가의 길을 걸으면서 3가지 목표를 정해 놓은 게 있는데, 첫째는 느리게 사는 것이요. 둘째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자는 것이며 셋째는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자다. 그런데, 살다 보면 일이 많아지고 성격상 생각대로 잘되지 않는 게 현실이어서 가끔 3가지 실천 사항을 종이에 써놓고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득롱망촉(得隴望蜀) 이란 고사 성어가 있다.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으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가끔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텅 빈 달 항아리처럼 마음을 비워두고 있을 때가 좋다. 그래야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도 지치지 않고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오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22대 총선이 끝났다. 선거 기간 중 국민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아마도 각 정당의 진영 논리에 의한 일부 정치 패널들의 담론과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정치 선전과 네거티브, 진정성 없는 공약이었을 것이다. 이제 전열을 가다듬고 국민들이 무엇을 바라고 원하는지 귀를 열고 잘 들었으면 좋겠다. 선거 기간 동안 확성기 소리와 난무했던 공약들이 오랫동안 걸려있던 빛바랜 현수막처럼 퇴색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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