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작은 뜰에 가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노란 미역취, 보라색층꽃, 한라돌쩌귀, 분홍색과 흰색의 구절초, 진한 향을 가진 보랏빛 꽃향유, 샛노란 섬감국, 코발트빛 잔대를 바라보며 꽃빛깔처럼 고운 가을 향기에 젖는다.
작은 뜰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볼품은 없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 그곳에는 계절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질서 있게 오가고 자연의 섭리가 조화롭게 진행된다. 그 소박한 모습에 분주한 일상에 지친 마음이 옹달샘처럼 맑아진다. 진한 가을향기는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가끔 잠자리도 날아든다.
들꽃들은 봄부터 자라 작은 싹을 틔우고 계절에 맞게 꽃을 피우고 벌에게 꿀을 나누며 함께 살아간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움은 아름다움을 동반하며 사색과 섬세한 바라봄으로 삶을 이룬다. 한두 포기 뜰에 심은 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기를 늘리고 가을 뜰안을 화사하게 연출한다. 가을 하늘보다 더 파랗게 핀 잔대, 가을꽃들의 청초한 모습은 화장하지 않은 맑은 소녀의 얼굴 같다.
벽에 붙은 담쟁이의 작은 잎도 어느새 고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계절만큼이나 화려한 색이다. 초록으로 여름을 벽에서 강인함을 보이더니 찬바람에 어쩔 수 없이 화려한 빛깔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 고운 잎새에 빠져 한참을 들여다보니 잎 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환한 웃음을 지으신 말이 없으신 어머니, 불러도 대답 없는 보고 싶은 어머니, 몇 번을 생각하며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다정히 다가오는 포근한 얼굴이다.
이제 내가 어느덧 어머니께서 소천하신 그 나이가 되었다. 언제 슬그머니 그 나이가 되었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왔다. 함께 만났던 친구들도 하나 둘 고된 삶을 떠난다. 아직은 이르다 싶은 나이인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다. 오늘 낮에도 여학교 때 친구와 오찬을 나누었다. 넷이 함께 삼 년을 등하교하던 친구, 지난 초여름에 췌장암으로 떠나고 우리는 셋이 되었다. 빈자리가….
분주한 일상에 가을산을 찾진 못해도 우리 집 작은 뜰에서 맞이한 가을이 있어 나는 감사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작은 집이다. 나에게 알맞게 지어진 집, 그 뜰에서 작은 꾸을 심고 기르며 그곳에서 전해지는 작은 기쁨은 마음 한 곳을 여유롭게 채워준다.
'사람은 어디에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학교 때 말씀하시던 사회선생님이 생각난다. 생각해보니 참 멋있었던 분이다.
삭막해지는 요즈음의 메마른 정서는 사람의 마음을 매우 피곤하게 해 준다. 그런 삭막한 메마름을 다소 덜어 줄 수 있는 것이 우리 집의 작은 뜰이다. 들꽃 포기마다 내 손길이 함께 깃들여 있어 더 소중하다. 땅과 꽃은 정직해서 내가 들꽃에 정성을 기울인 만큼 보답해 준다.
하루의 지친 마음들, 가을뜰에서 곱게 핀 들꽃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전해지는 향기 속에 푹 잠긴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김현승 님의 시를 음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