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이 방죽을 보며

2024.07.24 18:02:43

이효순

수필가

내 고향은 두꺼비 마을 산남동이다. 그날은 그곳에서 자란 후배와 함께 원흥이 방죽을 가기로 하고 승용차에 올랐다. 늘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 고향처럼 아련히 마음 한 곳에서 꼬물락 거리며 보고 싶어 하던 곳, 설렘을 가득 안고 집을 나섰다.

산남동 법원 숲 속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원한 숲길 원흥이 방죽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리 수술로 걷기 불편한 후배는 추억을 함께 나누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나와 함께 나섰던 참이다. 천천히 걸이서 원흥이 방죽에 다다랐다. 가는 길 주변 조성된 작은 습지에는 물에서 자라는 물풀들이 보였다. 그늘에 드문드문 있는 벤치는 도심지 고달픈 삶을 쉴 수 있게 시에서 자연 휴식공간으로 마련해 놓았다.

설렘을 안고 방죽 초입에 들어섰다. 방죽 옆에 지킴이처럼 버티고 있는 느티나무는 300년이나 되었다고 느티나무 앞에 명시되어 있었다. 주변엔 씨앗이 떨어져 자란 크기가 서로 다른 나무들이 여러 포기 둘러있었다. 느티나무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몇 해 전에는 진입로만 보고 갔었는데. 제일 큰 300년 된 대왕 느티나무는 내 양팔 크기로 열 번도 모자랄 것 같았다. 아마 모처럼 50년이 지나 보는 나무기에 그랬나 보다.

방죽 주변에는 내가 어릴 때 보았던 토종 풀들이 물이 졸졸 흐르는 입구와 방죽 주변에 자라고 있었다. 고마리, 창포 부들, 생이가래. 갈대. 마름 반가웠다. 그 풀들을 바라보며 50년 전 그때로 내 시간을 돌린다. 그때는 방죽을 중심으로 마을이 있었다. 마을 지명이 중말이었고 오 씨 한집, 김 씨, 이 씨가 네 가구 정도 살았다. 그곳 살던 친구 정남이는 육거리 시장에서 작은 노점상을 하고 있다. 우리 집은 방죽 건넌 마을에 있었다.

내게 잊히지 않는 기억은 방죽옆 마을에서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새벽송을 돌 때 마셨던 따끈한 감주맛이다. 나무대문 집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나무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등불을 밝혀 대문옆에 걸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등불을 바라보며 늦은 밤 간절히 기다리던 분의 마음이 등불에 보이는듯했다. 대문 외양간 옆 사랑방 좁은 곳에서 컵도 없이 작은 양재기에 마셨던 모락모락 김이 오르던 달콤했던 따끈한 감주의 그 맛,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행복해진다.

우리가 터널 아래 쉼터에서 쉬고 있을 때 유치원 아기들이 선생님들과 나들이 나온 모습도 보였다. 도심 속에 생태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산남동 택지개발 때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려움을 다 이기고 전국 도심 속 생태의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 좋은 것은 내 어릴 때 기억이 있는 곳이 복원되어 있어 더 고맙다.

50여 년 전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는 곳, 봄이면 물이 가득한 방죽에 하늘이 가득 담겼고 그 방죽언덕에서 봄나물을 뜯었던 기억도 어슴프레 생각난다. 지금은 그 언덕 주변은 모두 아파트 숲이 조성되었다. 눈을 감으면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에 잔잔히 일렁이던 방죽도 잊을 수 없다. 돌아오는 길에 고개를 돌리니 방죽 가운데로 잔물결을 내며 큰 자라 한 마리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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