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사족 李지서는 왜 역모를 꿈꿨을까

1728년 무신란

2015.07.16 14:12:24

조혁연 대기자

영조 24년(1748) 3월에 발생한 이지서(李之曙) 괘서사건은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문의 괘서 등의 순으로 전개되었다. 3월 17일 한양도성 궁궐에 괘서가 던져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4월 중순에는 충청도 청주에 "왜구가 곧 쳐들어온다"는 와언이 유포되면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피난행렬이 길을 메웠다. 곧이어 청주 인근 문의지역에 "문의 백성들은 어육(魚肉·물고기 밥)이 될 것이다. 倭人 같은데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오는데 물도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고 弓弓이 이롭다"는 비기(秘記)가 유포되면서 고을이 텅 빌 지경이 됐다.

지금까지의 내용 전개는 누군가가 사건을 면밀히 기획하고 이를 행동에 옮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충청감영이 수사에 나섰고 그 결과, 이지서라는 문의지역 50대 사족(士族)이 범인으로 체포됐다.

'이지서'와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했다'는 표현이 보인다. 영조실록 24년 5월 21일자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호서의 요적 이지서(李之曙)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대궐에 투서한 적은 끝내 추포하지 못했는데, 여름에 청주·문의 사이에 괘서의 변이 발생하여 몇 고을에 계속 소요가 일었으므로 짐을 싸서 지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려(州閭)가 모두 텅 비었다. 이지서가 감영에 의해 기포되었는데, 그 집의 문적을 수색하니 이지서의 시 내용에, '고사리를 캐 먹던 백이·숙제가 되어 은(殷)나라 백성들을 보호하고 싶다.[欲作採薇保殷民]'는 말이 있었으며, 또 비기의 순(順)자를 아조(我朝)의 역수(曆數)로 만들어 그 글자를 공교하게 해석하여 3백 80년이라고 하는 등 말의 뜻이 흉참스러웠다.'-<영조실록 24년 5월 21일자>

이지서 아들 항연(恒延), 6촌인 지양(之陽)·지목(之穆)·지억(之億), 문의지역 또 다른 사족인 오명후·박민추(朴敏樞), 서얼 박험백(朴驗白) 등도 동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지서가 영조 정부에 반감을 가진 것은 1728년(영조 4) 전에 일어난 무신란에서 비롯되었다. 20년전 그의 4촌인 이지시(李之時)가 무신란의 역당으로 몰려 처형되었고, 6촌인 이지경(李之璟)과 삼촌 이만춘(李萬春)도 무신란에 가담한 전력이 있다.

'감사 이창의(李昌誼)가 장문하였으므로 금오랑을 보내어 체포하였다. 이지서는 곧 무신년의 역적 이지시(李之時)의 재종(再從)이고, 이지경(李之璟)의 삼종(三從)이며 이만춘(李萬春)의 조카였다.'-<〃>

이지서는 이런 까닭에 무신란 이후 문의 향촌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하는 등 기득권을 상실한 잔반(殘班)이 됐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친국 과정에서 '뜻을 펼 수 있다'(意可伸)는 말은 '과거에 급제하여 의기를 펴고 싶다'(欲登科而伸意氣也)는 뜻에서 사용한 표현'이라고 답하였다.

이는 이지서가 무신란 이후 과거를 볼 수 없는 처지로 전락했음을 역으로 반증하고 있다. 그는 이같은 시대의 불만 때문에 한양 궁궐투서→와언 유포→청주 소요 사태→문의 괘서 순으로 이어지는 역모를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의에서 체포된지 나흘만에 한양으로 압송됐고, 국문 끝에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죄인 이지서가 물고(物故)되었다'-<영조실록 24년 5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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