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장곡서원 사건, 恨을 말하다

2015.06.30 13:27:45

조혁연 대기자

1728년 무신난은 보은현감 조문보를 처형하고 공신을 선정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난을 진압하고 죄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희생자는 반란 가담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금의 충북, 경북, 전북 등의 지역에서 많이 발생하였다. 충북의 경우도 편차가 있어 청주, 충주, 괴산, 진천, 보은, 영동, 황간 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생겼다.

그러나 이때 발생한 희생자들의 가족 한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응어리가 되어 고스란히 침전되어 있었다. 무신란이 발생한지 5년이 지난 17333년(영조 9) 보은에서 장곡서원(獐谷書院) 사건이 발생했다. 장곡이 어디인지 불분명하나 현재 내북면에는 노루실이 있다.

보은사람 이공형, 이인관, 이귀흥, 이제동, 김두병, 구준좌, 구이후 등 10명은 흉년이 들자 장곡서원에 모여 강도질을 모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공형이 정보가 새 나갈을 것을 우려하여 아우 귀흥을 살해하였다.

보은, 서원, 이제동 등의 표현이 보인다. 영조실록 9년 3월 21일자.

이때 마침 김두병이 도둑질을 하다 체포되었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역모가 있었음을 드러났다. 다음은 김두병의 원사(爰辭), 즉 심문 과정의 진술 내용이다.

"이귀흥과 이인관의 무리가 장곡서원에 모여 모의했는데, 도목 가운데에다 성명을 나열하여 기록했습니다. 이귀흥의 말이 '우리의 당여로서 서원·황간·영동·문의 등지에 있는 자가 1백여 인인데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도 하였고, 무신년의 일처럼 같이할 것을 약속했다.'고 하였고, 또 도원수와 부원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영조실록 9년 3월 21일자>

김두병의 진술 후 국청(鞫廳)이 설치되는 등 치죄의 강도는 한층 높아졌다. 국청이 설치됐다는 것은 영조가 친히 심문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실록은 10인 역모자의 주동자를 이제동(李濟東)이라는 인물로 기록하여 놓았다.

"이제동은 여러 적도들 가운데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데다가 문필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마침 서울에 와 있었기 때문에 포도청에서 규포하여 먼저 나국하게 된 것이다. 이날 영의정 심수현·좌의정 서명균·우의정 김흥경·판의금 김취로 등이 명령을 받들어 추국하였다."-<〃>

그가 거주지 보은이 아닌 서울에서 체포된 것은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은 알지 못합니다"라며 역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으나 그 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이호인이라는 인물이 사건의 최초 기획자라고 실토하였다.

"이호인이 말하기를, '너의 인품이 아깝다. 하필이면 이런 일에 시달리고 있는가? 만약 나의 말을 따른다면 좋은 바람이 불어올 때가 있을 것이니, 너를 곤수)로 삼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년에는 천운이 불리했던 소치이다.' 하였습니다."-<영조 9년 3월 24일자>

이제동은 처형됐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억울한 사람은 살려 줄 것을 호소하였다.

"신은 역모를 했으니, 장차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발한 사람 가운데 억울한 사람은 살려 주고 죄가 있는 사람은 처벌하소서. 김정우는 중인이고 서로 친했던 사람은 이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과연 무고했습니다."-<영조실록 8년 3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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