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와중에 해프닝적인 사건도 빈발

1728년 무신란

2015.06.25 16:04:05

조혁연 대기자

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은 참가 지역과 참여 인원이 방대하였던 만큼 그 희생도 엄청났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해프닝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인좌가 안성·죽산 전투에서 오명항(吳命恒·1673-1728)이 이끄는 정부군에 대패하였지만 경상도 지역의 반군세력은 계속 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정부군보다 먼저 이인좌의 패배 사실을 경상도 지역에 알린 알린 인물이 당시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이었다.

전투가 일어났을 때 이같은 정보는 피아간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오명항이 영조에게 그를 특별 진급 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옥천군수 임세겸(林世謙)은 안성의 역적들이 무너진 뒤 즉시 영남에 이문(移文)했는데, 영남의 역적이 패몰한 뒤 그 이문이 안음(安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규획이 진실로 칭찬할 만하니, 마땅히 포상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영조실록 4년 4월 26일자>

그는 한달 후 졸지에 옥천군수에서 청주목사로 벼락 출세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이인좌 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기집으로 도망갔다고 체포된 인물도 있었다. 바로 당시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이었다.

고지도 '지승' 의 율봉역

그의 이같은 행동으로 인해 율봉역에 있었던 말과 역노들이 고스란히 이인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율봉찰방 이제겸(李濟謙)은 영외(嶺外)로 달아나 자기 집에서 누워 있었던 탓으로 본역의 인마(人馬)가 모두 역적에게 제공되었으니, 먼 변방으로 충군(充軍)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영조실록 4년 4월 29일자>

당시 분위기로 봤을 때 이제겸의 행동은 즉시 처형대상이었으나 그는 목숨을 보전하였다. 여기에는 그의 아버지 이동표(李東標·1644-1700)의 청렴성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실제 퇴계 이황의 방손이지만, '소퇴계'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청럼했다. 영조는 이 부분 높이 샀고, 이로 인해 이제겸은 목숨을 잃지 않았다.

1728년 7월 15일. 영조 정부가 무신란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9천여명을 분무(奮武) 공신에 임명하면서 청주목 사람 이인좌가 주축이 됐던 무신란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조선시대 모든 공신녹훈 제도가 그렇듯이 분무공신도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1등, 2등, 3등, 원종공신 등 4등급으로 나누어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1등공신에는 실제로 난의 진압을 총지휘한 병조판서 오명항(吳命恒)이 책록되었다.

2등공신에는 직접 일선에서 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운 박찬신(朴纘新)·박문수(朴文秀)·이삼(李森)·조문명(趙文命)·박필건(朴弼健)·김중만(金重萬)·이만빈(李萬彬) 등 7인이 선정되었다.

3등공신에는 역시 반역을 토벌하는데 종사한 조현명(趙顯命)·이수량(李遂良)·이익필(李益馝)·김협(金浹)·이보혁(李普赫)·권희학(權喜學)·박동형(朴東亨) 등 7인이 책록되었다.

나머지 9천명 안팎의 인물은 명예 공신녹권만 주어지는 분무원종공신에 선정되었다. 무신란은 전국 규모의 반란사건이었으나 청주가 거점이었다. 따라서 원종공신 9천명 안에는 당시 청주 사람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1729년 5월에는 반란군 지도자 58명으로부터 적몰한 이인좌의 전답 2백78결과 노비468명이 오명함, 박문수 등 분무공신 15명에게 돌아갔다. 조선시대 1결은 대략 3천평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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