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역사를 품은 정이품송(正二品松)처럼

2024.04.04 13:38:59

남승연

보은군선거관리위원회 주무관

보은에는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건물 5층 높이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이라는 삿갓 모양의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1464년 세조가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가지에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올려 세조가 무사히 지나가도록 해서 정이품(현재 장관급)의 벼슬을 받았다는 소나무로 유명하다.

정이품송의 나이는 약 600년으로 추정된다. 이 긴 시간 동안 정이품송은 재해와 병충해 등 많은 역경을 겪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환경에 적응하며 조화롭게 살아왔기에 같은 자리에서 올곧게 자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자독식 체제의 정점이자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공직선거에서 정이품송의 살아온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은 없을까.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선거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라고 하면 금권선거, 비방·흑색선전, 지역주의 등 부정적인 단어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피로감을 주기에 나조차도 이런 말들이 오르내리게 되는 때에는 유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선거가 다가왔음을 체감하기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 대중매체 정치란을 보면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소모적인 논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영국에서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종식시킨 것은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실천한 매니페스토(Manifesto) 정책이다.

매니페스토란 '증거', '증거물'이란 의미의 라틴어 마니페스투스(manifestus)에서 나온 말로 1834년 영국의 필(Robert Peel) 보수당 당수가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공약은 순간의 환심을 살 순 있으나 결국은 실패한다"며 구체적인 공약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후보자는 목표, 이행 가능성, 예산 확보의 근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유권자는 후보자가 내놓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따져서 자신의 이념과 맞는 후보자를 선택한다. 당선 후에는 이행 사항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서 공약을 지켜나가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은 '참공약' 시민운동을 말한다.

이런 매니페스토 정책선거는 대한민국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2006년 지방선거에 처음으로 도입돼 선거관리위원회와 일부 시민단체에서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나라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국민이나 정치인에게도 단어조차 낯선 게 현실이다.

후보자는 국가 혹은 자기 지역을 위한 발전 방향을 심도 있게 고민한 후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차별화된 실천 방법을 모색해 공약을 발표하고, 유권자는 지연·학연과 같은 개인적인 친분관계나 소속 정당에 연연하지 않고 공약으로써만 후보자를 판단하여 투표하는 정책선거가 우리나라에도 뿌리내리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후보자 간 또는 후보자와 유권자 간 상호 건전한 비판과 협력이 이뤄져 허위·비방, 흑색선전과 같은 전근대적인 선거문화가 사라졌으면 한다. 또한 조화와 상생으로 숱한 역경을 올곧게 견디며 600년을 살아온 정이품송과 같이 우리나라 정치도 '조화와 상생'이 함께 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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