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의 단상

2023.08.22 16:41:04

[충북일보]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4번째인 처서(處暑)다. 말그대로 더위가 그친다는 절기다. 아직도 한낮에는 30도를 넘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아침 저녁 코 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가을내음이 실려있는 듯하다. 예부터 우리 주변에는 처서에 관한 얘기가 많이 전해져 온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말도 있고, '처서에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처서를 기점으로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 많다. 계절의 변화는 우리 일상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들의 생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지나간 여름보다는 다가올 가을을 대비하는데 마음이 달려간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올 여름의 끝자락에서는 그런 마음이 선뜻 들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그건 쉽게 잊혀지지 않는 2023년 여름의 강력한 잔상 때문이 아닐까. 우린 이번 여름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역대급 극한호우로 인한 전국적인 비피해, 연일 40도에 육박하는 역대급 폭염, 서울과 분당에서의 잇단 묻지마 칼부림, 서울 서이초 여교사의 극단선택,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새만금 잼버리 등 불과 한달도 안되는 짧은 여름철에 하루가 멀다하고 메가톤급 충격이 온나라를 휩쓸었다. 이들 사건·사고가 대한민국사회에 던져준 충격과 메시지는 지금까지의 경험치를 모두 넘어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지난달 15일 발생한 오송지하차도 참사는 충격을 넘어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사고가 아닐까. 극한호우로 미호강 제방이 유실돼 궁평 2지하차도로 6만t의 하천수가 유입되면서 발생한 오송지하차도 참사로 14명이 숨지고 10명이 다쳤다. 청주에서 발생한 단일 사건·사고로는 꼭 30년전인 1993년 1월 발생한 우암상가아파트 붕괴사고(사망 28명,부상48명) 이후 가장 많은 희생자를 기록한 대재앙이었다. 사고발생 직후 사고원인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유관기관간에 '마치 내책임이 아니다'라는 식의 불편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상당기간 이어졌다. 언론과 시민단체, 정치권 등에서는 사고원인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명확한 책임소재를 묻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처럼 충북 전체를 한달간 뒤흔들어 놓았던 엄청난 사고였지만 한달이 지난 현재까지 속시원한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허투루 다룰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 사고의 최대 피해자라 할 수 있는 희생자 유족들과 비록 사지(死地)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왔지만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생존자들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유족들은 "참사 발생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여전히 진상규명과 참사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라며 "그간 사고 발생후 한달간 정부와 지자체가 보여준 것은 위로와 해결이 아닌 상처뿐이었다"고 절규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전히 정부와 지자체가 유족과 제대로 소통하지 않고 있다"며 "지금도 누구하나 진정성있게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분노하고 있다.

이러한 유족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는 '네탓' 공방이 여전하다. 진정으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답답하고 안타깝다. 지금은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다.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사고에 대한 실체적 사실을 직시하며, 누구보다 힘들고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을 유족과 생존자를 위로하고 보듬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때다. 조금 있으면 맹위를 떨치던 뜨거운 여름도 가을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세월에 흐름에 따라 아픈 상처도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서 우리 사회가 보편적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좀 더 건강한 사회로 가기 위해선 어떤 생각과 행동이 필요한지 한번쯤 여미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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