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곳곳에 책들이 널브러져 있다. 요즘 칩거 하는 시간은 늘었지만 왠지 전보다 게을러져서인지 집안 꼴이 엉망이다. 이불장의 이불들이 대충 개켜져 있다. 현관에도 가족들이 벗어놓은 신발이 뒤죽박죽 엉켜 놓였다. 그러고 보니 지난날 이 모든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제자릴 찾았던 것은 모두 나의 손길에 의해서였다. 이즈막은 전과 달리 집안 정리엔 뜻이 없어진 듯하다. 평소 무엇이든 제 모양을 잃는 것을 경계해 왔다. 이는 병적이리만치 다소 심한 편이었다. 서재에 책도 제 키 높이에 따라 꽂혀있어야 안심했다. 자고난 후 침대 위의이불도 주름살 하나 없이 쫙 펼쳐져 정돈돼 있어야 했다. 거실의 커튼도 열었을 때 접힌 주름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것을 확인 한 후 끈으로 묶곤 했다. 이런 나름대로 사물에 대해 정해놓은 규칙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수년전 건강을 잃은 후, 실은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찼다는 게 이유라면 궁색한 변명일까?
지난날 스스로 정한 삶의 규칙을 논하노라니 갑자기 가슴에 손을 얹게 된다. 삶 속에서 사물에 대한 여느 규칙을 정해 일상을 영위했던 것처럼 '나의 마음 속 고갱이도 그토록 반듯한가?'에 대한 성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격의 절차탁마에도 힘쓴 적 있던가?' 되돌아본다. 내면이 무르익으려면 마음의 규각(圭角)인 날선 각을 둥글려야 해서다. 그러기 위해선 오로지 눈앞의 잇속이나 물질의 신기루만 좇던 허공에 들떠있는 마음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나 같은 경우 요즘 코로나19에 시달려서인지 마음자락이 여유롭지 못하다. 가끔 심연이 향방을 잃고 갈팡질팡 헤매기 예사다.
어느 날 외출을 하다가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다. 그 옆에 세워진 전봇대에 '강아지를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온몸이 털로 뒤덮은 귀여운 강아지 사진이 인쇄된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게시물엔 5년을 자식처럼 키워온 강아지인데 잃어버려 밤잠을 못 이룬다며 찾아주는 분께는 사례하겠다는 견주의 간절함도 구구절절 적혀 있다.
이 게시물을 읽은 후 ' 집 나간 강아지를 애타게 찾는 것처럼 평소 견주 자신의 잃어버린 마음을 저토록 찾아보려 애써 봤을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봤다. 이 생각에 이르자 언젠가 읽은 부천 대 김광식 교수가 펴낸, '춘성-무애도인 삶의 이야기'라는 책 속의 춘성 스님에 관한 내용이 문득 떠올랐다. 지난날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의 일화로도 유명한 스님이다. 그 시절 방범 순찰중인 경관과 맞닥뜨린 스님은 경찰관이 "누구냐?"고 자신에게 묻자, " 나는 중(僧)대장이다" 라는 말을 했다. 경찰관이 이 말에 플래시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비춰보니 행색이 스님이었다. 그 경찰관이 " 당신 스님 아니시오?" 라고 묻자 춘성 스님은 " 그래 내가 스님의 대장이다"라고 되받아쳤다.
춘성 스님( 1891-1977)은 평소 법문 때에도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발설하는 등 기행(奇行)을 일삼았다. 또한 중생을 향한 사랑도 깊어 헐벗은 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이 입었던 옷도 선뜻 벗어주곤 했다. 그는 만해가 3·1 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제자 된 도리로서 스승이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고생하는데 자신만 따뜻한 아랫목에 지낼 수 없다며 스스로 냉방을 자처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가 열반에 들을 때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거라는 제자들의 우려에, "시X놈의 자식! 넌 신도 위해 사냐?"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자신이 입적해도 절대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춘성 스님이다. "갈 때도 무(無)! 올 때도 무(無)! 똥 쌀 때도 무(無) 하세요." 라며 강조하던 그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요즘 따라 못내 그립다. 이는 그동안 물질의 집착과 과욕의 노예였던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고 싶어서다. 마음이야 말로 제대로 갈고 닦음 강철보다 강하고 보석보다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