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김나비
충북시인협회
껍질을 벗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
나는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의 경계에 산다
오늘은 11번째 나를 버리는 비명의 종착점
단단하게 벗겨지는 또 다른 나를 본다
암전된 소리 틈에서 돋아나는 검은 비명을
몸속에 구겨 넣으며 시간을 갉아먹는다
컴퓨터와 텔레비전 속은
어둡고 따듯해 내가 살기에 딱 좋은 곳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말없이도 말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꿈꾸는 세상
내 영혼을 각진 블랙홀 속에 묻는다
나를 흡입하는 어둠 속 환한 세상에서
종일 빛을 끄고 그들과 시간을 분할한다
사람들은 왜 같은 발자국만을 찍으려고 할까
내게 달콤한 음식을 내놓는다
세상을 맛보려 더듬이를 내밀 때마다
온몸을 찌르는 차가운 빛의 칼날들
칼을 던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구석으로 몸을 숨긴다
한 걸음 물러서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어둔 세상을 더듬는 깊은 침묵
나는 작은 바퀴벌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