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개의 꼭지에서 일제히 물줄기가 뿜어져 나온다. 자동 살수기가 하우스의 오른쪽 끝에서부터 천천히 왼쪽으로 이동하며 초록 실처럼 올라온 대파 모종에 물을 주고 있다. 물줄기는 딱 알맞은 굵기와 세기로 분사되며 딱 봐도 어느 한군데 빠진 곳 없이 골고루 흠뻑 적셔주는 것 같다. 너무 세거나 굵으면 모판의 흙이 패여 나갈 테고, 그렇다고 안개처럼 미세하면 공중으로 흩어지는 양이 많아 충분히 젖지 않을 것이다. 그 사이 어디쯤 최적의 상태를 찾아 설정한 것이 내가 보고 있는 저 물줄기이리라.
아들은 지난 이태 맨땅에 헤딩하듯 멜론 농사, 참깨 농사, 온라인 농산물 판매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멜론 농사를 지을 때 올망졸망한 낙과를 한 보따리 들고 들어와 장아찌를 담가보자 해서 군말 없이 소금물을 풀어 장아찌를 담가주었다. 작년엔 참깨 농사를 지었다. 어느 새벽 깨를 털고 나서 '엄마, 아들 죽겄어유' 하며 들어오던 땀에 젖은 아들 가슴팍에 깨알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엄지를 추켜세우며 유쾌하게 웃어넘겼지만, 엄마의 속마음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이렇다 하게 잡히는 게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아들의 힘든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다 '청년창업농' 2년 차인 올해부터는 육묘장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청년창업농'이란 젊은 청년들이 농촌에서 농업인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프로그램이다. 초기 생활 자금이나 필요한 영농교육 등을 몇 년에 걸쳐 지원해준다. 지원을 받는 청년 농부들끼리는 지역 단위로 함께 교류하며 서로 정보도 교환하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푸른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렇게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모여든다면 우리나라 농업 전망에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농촌이 젊어져야 한다.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연구하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희망찬 감동이다.
상토 분쇄기며 파종기, 발아실을 차례로 안내하고 자동화된 설비시설도 설명해주는 아들, 구분하기 힘든 갖가지 채소의 어린싹들도 자세하게 알려준다. 설날 이후 하루도 쉬는 날 없었다며 엄부럭을 떨어도 표정에는 신바람이 묻어 있다. 아들은 농민후계자로 병역특례복무 중이다. 지난달에 증평에 있는 훈련소에서 3주간의 군사교육을 받고 왔다. 들어갈 때 깎은 머리가 자라 까까머리 밤송이가 됐다. 내 눈에는 그 모습마저 대파 양파의 어린싹과 어우러져 묘하게도 귀엽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군대에 갔다 와야 한다' 했던 생각이 요즘 아들 모습을 보면서 달라졌다. 농촌에서, 또는 전문인력이 필요한 여러 산업현장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는 것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다만 3주 후 바로 산업현장에 복귀하는 사정을 참작하여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는 조항에 융통성을 주자는 의견에는 한 표를 더하고 싶다.
다시 살수기가 진격해온다. 초록 물결 대파 모종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어린 시절,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논둑에 서서 어른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비 한번 시원하게 오신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비에 대해 존대를 했겠는가. 어쨌든 그동안 아들을 지켜봐 온 내 마음도 시원하게 씻겨지는 듯하다.
응달쪽으로는 곳곳에 눈더미가 아직 남아 있지만, 농장은 이미 봄 속에 있다. 아들의 봄은 온통 초록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