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여행할 때, 그 도시의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어도 서가에 꽂혀있는 책의 겉표지 보는 것을 좋아한다. 창의 위치와 책상과 의자의 배치는 어떤지, 조명은 어떤 각도로 비추는지, 어떤 방향으로 햇볕이 드는지, 창 너머의 풍경이 어떤지 살핀다. 그곳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천천히 관찰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책상 의자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도서관의 디자인이 그 도시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믿는 편이다. 도서관이 마음에 들면, 그 도시에 살고 싶단 생각을 한다.
#싱가포르, 에스플러네이드 도서관(library@esplanade)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에스플러네이드 3층에 도서관이 있다. 세련된 내부 인테리어와 조명, 싱가포르의 상징인 멀라이언과 바다를 조망할 수 있도록 바다를 향해 있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싱가포르 사람들이 조금 부러워졌다. 에스플러네이드에서도 가장 전망 좋은 공간이 유명 셰프의 '파인 다이닝'이 아닌, 도서관이 되기까지 쉽지 않은 합의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비싼 장소' 대신,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장소'로서 도서관으로 제공한 것이 바로 싱가포르의 저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전망이 가장 좋은 장소가 도서관인 도시라면, 그 도시에 산다는 것만으로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까.
#일본, 지중도서관(地中圖書館)
지바현 키사라즈시에는 지중도서관이 있다. 말 그대로 '땅속도서관'이다. '쿠르쿠 필즈(KURKKU FIELDS)'라는 농장에 위치한다. 30여 평의 작은 도서관은 자연 그대로 대지의 경사를 따라 땅 아래에 숨어있다. 지붕을 덮은 잔디는 그 마을의 신성한 연못과 푸른 계곡으로 이어진다. 건물이 들어앉은 틈을 위에서 보면 물방울 모양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배경 같다. 이곳 사람들은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카페와 레스토랑과 숙소를 운영한다. 한때 이곳은 건설 폐기물이 가득했던 땅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줄기와 숲을 복원하고, 생명의 근원으로 회복했다.
낮에는 어린이들이 책을 보고, 밤에는 농부들이 모여서 시 낭독회를 여는 도서관은 상상만으로도 근사하다. 도서관은 밤엔 숙소로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지중도서관에서의 하룻밤을 상상한다. 도서관이 여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미국, 뉴욕공립도서관(The New York Public Library)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8)'는 뉴욕공립도서관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도서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도서관은 책을 읽거나, 빌리러 가는 곳만이 아니다. 영화는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도발적인 강연에서 시작한다. 시민들은 자유롭게 토론한다. 도서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청소년들의 학습과 중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다. 인터넷 사용료를 낼 수 없는 가정에 핫스팟을 일정 기간 무상 제공한다. 예산 부족 환경에서도 노숙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지 고민한다. 시민들은 도서관에서 흑인 노예의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의 오류를 찾아내고, 출판사에 의견을 개진한다. 한 명의 소리는 작지만, 단결된 시민의 목소리는 힘이 세다.
도서관이 그 도시의 품격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한 비유일까.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꿈과 이상이 있다. 도서관은 꿈과 이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을 돕는다. 그들은 더 좋은 사회의 이상을 공유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연대한다. 그런 도시의 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 중심에 도서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