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온천가의 노천탕 입욕기

2018.11.04 15:46:39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가을이 물들어가는 어느 날 제천 모 초등학교에서 학부모 대상 교육을 요청하기에 '자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법'을 주제로 길을 나섰다. 단풍은 초입이요 황금들판에 날씨까지 화창한데 강의 구상을 하다 보니 어느 덧 학교 앞이다.

 농촌지역 학교답게 여남은 명의 학부모가 도서실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데 그래도 강의에 대한 엄마들의 반응이 기대를 훨씬 넘어선다. 기분 좋고 활기 넘친 분위기로 2시간을 짧은 듯 마치자 곁에 앉아 있던 담당선생님이 먼 길 오셨는데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가란다. 집 나오면 끼니 해결도 나름 신경 쓰이는 일이거니와 선생님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도 없어 식당으로 향했다.

 유치원 학생들 앞자리에 앉아 바라보니 손녀 또래의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밥 먹으면서 주위에 관심을 주고 있어 유치원 선생님의 식사 도움 손길이 바쁘게 돌아간다. 이 모습에 나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점심도 맛나게 먹고 안동으로 향했다. 내비가 안내하는 대로 가는 길에 차가 죽령으로 접어든다. 이곳은 군대 말년에 연화봉 정상에서 근무했기에 많은 추억이 살아 있는 고개이다. 예전에 이 고개 마루에서 퇴계선생이 단양 관속들이 관례에 의거 바쳤던 삼을 되돌려 주셨던 일화도 생각하며 산을 거의 다 내려가는 길목에 풍기온천 팻말이 보인다. 시간도 넉넉한 참에 다시 고독한 온천가가 돼 심신을 쇄락하게 해 보리라 마음먹고 차를 돌렸다. 피부에 좋은 온천이라 소문난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주차장에 차가 의외로 많다.

 탕 온도는 기분 좋게 따뜻하고 유황 온천수답게 물이 매우 부드럽다. 언뜻 노천탕 표시가 눈에 띄기에 나가는데 입구에 산소량이 많은 곳이라는 안내 글이 있다. 이번에는 산소 풍부한 산자락의 노천탕을 즐기려 마음먹고 둘러보니 넓은 욕조는 텅 비었고 두 명만 탕 가장자리에 대자로 누워있다. 대중탕 탈의실에서 상체가 실한 사람은 팬티를 먼저 입고, 하체가 자신 있는 사람은 런닝을 먼저 입는다 하던데 이 사람들은 민망한 곳도 안 가린 편안한 자세로 보아 온 몸에 자신이 있나 보다.

 맞은편 소백산 자락에는 바람이 솔솔 불어 소나무가 산들거리고 산 고개 위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여간 한가로운 것이 아니다. 탕 안에서 바라보는 내가 홀로 흐뭇하고 여유로운데 이런 정경에 붙여 양나라 처사 도홍경의 시가 떠오른다.

 조문산중하소유부시이답(詔問山中何所有賦詩以答-산속에 무엇이 있느냐는 물음에 시를 지어 답함)

 산중에 무엇이 있나 (山中何所有)

 언덕 위에 흰구름이 많다네(嶺上多白雲)

 다만 스스로 유쾌하고 기뻐할 뿐이요(只可自怡悅)

 그것을 가져다 임금에게 드릴 수는 없네(不堪持贈君)

 '산중의 생활이 뭐가 좋아 짐의 뜻도 몰라주고 도대체 나오지를 않는가?' 하는 양 무제의 힐문을 받고, 답을 하고자 입을 열면 헛소리가 되고 생각을 일으키면 어긋나는 법이라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는데 문득 산꼭대기에 구름 한 덩어리가 걸려 있단다. 산 위 높다랗게 구름이 걸려있는 모습이 지금 탕안 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자락 위의 구름과 흡사하겠다. 다만 벼슬길과 무관하고 게다가 퇴임한 야인을 조정에서 부를 일도 없는 내야 산중재상으로 불린 도처사와는 한참 다르지만 보고 느끼는 감흥은 비슷하지 않을까나.

 따끈한 노천탕에 홀로 앉아 이제는 코까지 골아대는 옆 사람은 아랑곳없이 상큼한 산속 공기와 멀리 산마루를 휘도는 뭉게구름으로 오후가 흘러간다. 이렇게 목욕을 할 수 있다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스스로 유쾌한 가운데 즐거움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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