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 버리고 간 양심

2009.09.03 20:07:09

노종우 경장

청주흥덕경찰서 사창지구대

열흘쯤 된 것 같다. 금요일 저녁 출근을 해서 전 근무조와 교대를 하는 어수선함 속에 지구대 출입문을 열고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이 황급히 들어왔다. 본인과 눈이 마주치기에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으니 그 중 키 작은 여학생이 “경북 구미에서 친구를 만나러 청주에 올라왔는데 지갑을 잃어버려 집에 갈수가 없어 친구가 경찰을 찾아가면 도와준다고 해 이렇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지자체에서 행려자에 대해 예산 책정 범위 내에서 여비를 지급해 주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시간은 19:50경이었고 구미 가는 막차가 20:30이라고 했으니 관할 구청이나 동사무소를 찾아 도움을 청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다. 직업이 뭐냐고 물으니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는 대학생이라 했다. 나도 대학시절 주요 이동수단이 버스였고 막차를 놓쳤을 때의 당혹스럽고 난처한 상황을 경험한 터라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

‘경찰에서는 여비지급을 해주고 있지 않다’고 하니 애처로운 표정으로 “그럼 아저씨가 빌려주면 다음주 월요일에 틀림없이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구미가는 버스요금이 얼마냐’고 하니 그때 아마 8천몇백원이라고 했던 것 같다. 여성상대 범죄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고 사정이 딱해 마침 지갑에 출근 전 찾아놓은 현금이 있었기에 2만원을 건네주며 ‘사정이 딱하고 학생들의 양심을 믿기에 어떤 인적사항이나 연락처도 묻지 않고 차비를 빌려줄테니 약속을 지키기 바란다’며 본인의 계좌번호와 이름만을 메모해 건네주니 두 대학생은 연신 "고맙다, 월요일에 틀림없이 돈을 보내주겠다"며 지구대 문을 나섰다.

그 여학생들이 약속한 월요일이 왔다. 사실 그들이 약속을 지킬까 반신반의한 마음에서 평소보다 수시로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게 되었다(거래은행에서 입출금 통보서비스를 SMS로 제공해주고 있기에). 내 맘 같았으면 은행 업무가 개시되자 마자 입금을 해주었을텐데 그 날은 은행업무 마감시간까지 문자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뭐야 이거 경찰관 상대 신종 사기수법인가? 허탈한 웃음이 나와 아내에게 그동안 일어난 상황을 얘기하니 웃으며 좋은일 적선했다고 생각하라고 한다. 좋은일 했으니 좋은일이 생길 거라고…

다음날 출근해 지구대 앞 정류장의 시간표를 확인해보니 정말 구미가는 버스는 20:30이 막차였다. 그들은 정말 지갑을 잃어버렸을까? 정말 구미에 살고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었을까? 빌린 여비를 보내줄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을까? 그들은 어디서 그런한 것을 배웠을까. 어디까지가 진실인진 물론 그들만이 알 것이다.

위와 같은 상황은 동료 선후배 경찰관들도 수차례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경찰을 찾아 온 것에 감사한다. 그런데 만일 내가 그때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며 그들은 경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도움을 요청하러 갔는데 나몰라라 했다며 평생 불신하며 살지 않았을까? 차라리 돈을 보내주겠다는 등의 약속을 말고 단순하게 도와달라고만 했으면 덜 씁쓸하였을 것을.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우리 사회가 아님 우리들이.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에게 혹시 만연되어 있는 도덕적 해이는 아니겠지’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늘도 순찰차 경광등 깜빡이며 순찰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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