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2016.08.18 16:26:02

김홍성

충북인재양성재단 사무국장

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가끔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 '봉숭아'의 가사이다. 쉬운 가락과 노랫말이 왠지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시린 가슴을 파고든다고나 할까. 낮고 느린 음으로 시작하여 꽃망울이 터질듯 한 절정의 순간 절제했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는 음악적 기교는 이 노래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어릴 적 자랐던 토담집 울밑을 서성이는 듯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친근한 노랫말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고 만다.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꼭 망국의 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라 정서적 공감대를 자극하는 이와 같은 마력이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평범함 속의 비범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봉숭아는 이름처럼 수수한 꽃이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지친 삶을 이어가기 벅찬 가운데서도 앞마당, 울타리 가릴 것 없이 소복하게 가꾸었던 식솔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보다 '어여쁜 아가씨들'의 아주 가까운 동무였기 때문이다. 아는 것처럼 봉숭아는 한여름 더위 속에서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나 붉은색 봉숭아가 그 중 예뻐 우리 누이들의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가까이 있으며, 소박한 가운데 순정을 상징하는 우리 꽃 봉숭아. 누군가 '은근과 끈기'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한다고도 했는데 혹시 이 봉숭아를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그런 봉숭아가 이제는 귀한 몸이 되었다.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대략 네 해 정도 되는 것 같다. 여름마다 봉숭아꽃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을 하게 된 것이. 시작은 아주 우연이었다. 어느 기관을 방문했다가 마주친 봉숭아를 한 움큼 따와서 그 해 처음으로 아내 손에 물을 들여 주었던 것이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백반을 섞은 이파리와 꽃을 곱게 찧은 다음 손톱에 얹어 물을 들이는 과정이 나름 재미있기도 하였다. 그 때가 처음 시도인지라 딴에는 정성을 다한다고 열손가락을 꼭꼭 싸맨 채 하룻밤 내내 견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하기야 그 바람에 첫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색깔을 뽑아내어 그렇잖아도 고운(·) 아내 손이 더욱 빛나고 예쁘게 보인 것이리라.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연일 계속되는 폭염의 강도가 거의 살인적이어서 모두들 몸살을 앓듯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나 스스로 부여한 특별한 미션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 7월을 넘기지 말자 다짐을 하고 급기야 어느 날 하루 작전에 나섰는데.. 아뿔싸. 점찍어 두었던 목표지점 서너 곳을 샅샅이 뒤졌으나 사랑스런(·) 봉숭아, 이파리조차 구경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실망스런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고 이후 한두 차례 더 다른 곳을 공략했으나 백약이 무효, 내리쬐는 땡볕 아래서 진땀 아닌 진땀만 잔뜩 흘리고 말았다.

그렇게 지천에 가득했던 꽃들이 사라지고 없다. 아니 꽃들이 사라졌다기보다 우리의 삶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동네 고샅 어디서나 소복하게 모여 도란도란 거리던 그들의 자리를 옛이야기만 남긴 채 개발의 광풍이 대신하고 있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찌 한 마디로 답을 할 수 있으랴. 새로운 세상, 달라진 환경에서도 주절주절 또 다른 사연이 생겨나고 사람들의 삶 역시 아옹다옹 이어질 텐데. 다만 그러한 변화와 세태 속에서도 무 자르듯 하는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옛이야기 벗 삼아 내일을 꿈꾸는 따뜻한 세상이 그리운 것이다.

봉숭아 꽃잎 하나에 차마 표현치 못한 정을 담아 어여쁜 그대 손에 빨간 물을 들이듯이. 그런 마음 부여잡고 하염없이 여름날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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