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은 이정의 ‘풍죽도(風竹圖)’

강직·청렴·고결함 탄은 정신 그대로

2008.08.06 20:13:38

문학소녀적인 취향이 있는 사람치고 대나무 숲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져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영화에나 나올법한 울창한 대숲에 들어 앉아 나무 사이사이로 새어들어 오는 찰랑거리는 빛을 느껴보고 싶었다. 어둡고 고적하고 스산한 밤 대숲이 내는 괴기스러운 바람소리를 느껴보고 싶었다. 마치 이런 느낌이 문학에 영감이라도 줄 것처럼, 그 대나무 숲이 주는 막연한 이미지를 갈구했었다.

그것은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갈증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내륙 충북은 대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닌 모양이다. 주로 중부 이남이나 제주도에 흔히 멋스러운 대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

언젠가 시골에 집을 짓고 살게 되면 제일 먼저 대나무를 심어 그 느낌을 맛보면서 살리라 했었다. 숲을 이룰 정도는 아니지만 몇 그루 대나무를 심어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지인의 도움으로 대나무 집산지로 유명한 담양에서 대나무 몇 그루를 공수해 왔다. 대나무의 생육환경이나 특징은 전혀 무시한 채 대나무가 갖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만을 좋아하며 땅을 파고 마구 잡이로 심었다. 한 해 두 해 바라보았지만 그것이 숲을 이루기에는 멀고먼 길인 듯 했다.

그렇게 무심히 몇 해를 넘겼는데 어느 날 몇 그루의 대나무가 심어진 곳이 작은 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언제 비어져 나왔는지 모를 죽순이 새 줄기를 만들어 위로 뻗어나기 시작했으며 대나무에 생기가 돋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대나무라는 것이 한번 심어 놓으면 땅속에서 적어도 5년은 몸을 풀어야 땅위에서 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로 솟은 나무보다 땅속의 뿌리가 더 강해 그 뻗어나가는 속도가 대단하다는 것은 그런 시간을 지나온 대나무의 속성 때문이었다.

‘풍죽도’

(비단에 수묵, 127.8x70.4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선비들이 문인화를 그릴 때 매(梅)난(蘭)菊(菊)죽(竹)의 사군자(四君子)는 그림의 단골소재였다. 유교를 숭상하던 선비들이 바라보기에 이들 사군자가 꼿꼿한 지조와 절개, 고결함이 있는 군자(君子)를 닮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 혹은 벗들에게 시문을 지어 보일 때나 그림으로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때 이 사군자의 그림을 즐겨 그렸던 것이다. 전문 화인이 아니고 벼슬한 사대부 집안의 선비나 귀족들이 여기로 그린 그림 중에 사군자를 소재로 한 문인화가 많았던 이유다.

여기로 그리는 그림이어서 표현이 서툴고 묘사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담긴 관념의 세계를 정해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렸다는 면에서 오히려 그린이의 성정이 잘 드러나는 것이 문인화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 그림이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인화가로는 강희안, 김 제, 이 암, 이 정, 윤두서, 강세황, 김정희 등이다. 이들은 당대에 나름대로의 필법과 개성을 갖고 이름을 얻고 있어 그들의 그림양식이 오히려 전문 화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만큼 그 특징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들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사군자중 선비들의 시와 그림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대나무라고 한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으로 알려진 ‘시경(詩經)에서 주나라 무왕의 높은 덕을 칭송하여 그 인품을 대나무에 비유했으며 그 후 난세를 맞아 정치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간 죽림칠현(竹林七賢)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대나무는 고결하고 지조 있는 사람을 상징하면서 많은 그림이나 시에 등장한 것이다.

대나무 그림에 유독 강한 애착을 보였고 덕분에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갔던 이가 탄은 이정(1541~1626)이다. 이정의 대나무 그림은 다양한 제목으로 현존하는 것이 많다.

탄은의 대나무 그림 중 구도나 색감에서 완벽하기로 평이 나 백미로 꼽는 ‘풍죽도’(비단에 수묵, 127.8x70.4cm, 간송미술관 소장)를 비롯,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묵죽도’(지본담채, 131.8x60.6cm), 호암미술관 소장의 ‘묵죽도’(비단수묵, 122.8x52.3cm), '금니죽’ ‘우죽’ ‘설죽’ 등이 있다.

‘묵죽도’

(지본담채, 131.8x60.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정은 세종대왕의 현손(고손자)으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로 불리는데, 특히 묵죽을 잘 그려 조선 제일의 묵죽화가로 칭송되고 있다. 그는 더욱이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던지 그 후에 오히려 왼손으로 그린 그림이 격조가 높아졌다고 전해진다. 탄은의 묵죽 그림 중 단연 으뜸이라는 ‘풍죽도’역시 만년에 왼손으로 그린 그림으로 전해진다.

그림 ‘풍죽도’를 바라보면 이렇다. 해미가 뒤덮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 외딴 섬, 그 안에 초가집이 있고 뒤뜰과 이어진 산자락에는 아무렇게나 자란 대숲이 있다. 그중 그림을 그리려는 이의 눈에 뜨이어 홀로 바위에 걸터앉게 된 게 탄은의 풍죽이 되었다.

다른 대나무들은 옅은 담묵(淡墨)을 써 안개 속에 감춰져 있고 오직 한그루의 꼿꼿한 대나무만이 농묵(濃墨)을 써 탄은의 붓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바람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분다. 댓잎의 끝은 가늘고 날카롭다. 마디가 그렇게 굵지는 않지만 그 가는 마디 사이에서 비어져 나온 댓잎을 보아도 그것이 결코 만만하지 만은 않아 보인다.

대나무가 갖고 있는 상징성이나 대 숲이 갖고 있는 모든 이미지를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모두 느낄 수 있다면 무리일까. 꼿꼿하고 강직하고 단아하고 깨끗한 대나무의 이미지나, 스산하고 차가운 겨울의 대숲, 활량하고 건조한 봄의 대숲, 찰랑거리는 녹음이 우거진 대숲, 잎을 갈아주기 위해 엽록소를 모두 배출해버려 깡마른 대숲, 저들끼리 부딪치는 청명한 소리나 스산하고 괴기스러운 소리. 이모든 이미지들을 품고 있는 대 숲이 그림 ‘풍죽도’에 들어 있다.

당대의 문인이자 탄은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최립은 그의 대나무 그림에 대해 “엉성하면서도 재미가 있고 치밀하면서도 싫지가 않다.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들리는 듯 하고, 색이 같지 않은데도 진짜 대나무와 꼭 같아 보이며 기운이 나타나지 않는데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덕이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의젓하여 공경할 만 하다. 이것이야말로 뜻과 생각에서 나와서 저절로 만족스럽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 글은 현대의 그 어떤 평론가가 탄은의 그림을 평한 것 보다 정확하게 와 닫는다. 그림을 보면 그린이의 면면을 알 수 있다는 말은 이 같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듯 하다.

당대 이 정이라는 이는 왕가의 자손이자 선비이면서도 왜적의 침입에 뒷짐 지고 있던 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벼슬아치들이 궁궐에 모여 탁상공론을 펼치고 있을 때 칼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어느 현장에 있었던 모양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인 절박함이나 전쟁에 나간 군사들의 비장함을 염려하며 그 고통스러운 마음을 대나무 그림으로 다스렸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정애 (소설가·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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