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에세이 - '설국열차'

운명의 미로를 달리는 인류의 열차 영화

2013.10.27 15:52:58

기차의 의미

기찻길 옆 오막살이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잘도 잔다.

기찻길 옆 옥수수밭

기차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동요다. 별 생각 없이 흥얼거렸던 노래지만 가만 들여다보니 사람들의 기차에 대한 일반적 정서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기차 소리 요란한데 어찌 아기가 잘도 잘까. 기차에 대한 향수어린 근원적 호감이 배어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비행장이나 일반 차량에 대한 주거민들의 소음 시비는 들어보았어도 기차 소음에 대한 분쟁은 별로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이렇듯 기차는 인간의 탈것 중에서 묘한 정취를 자아내는 도구다. 이런 점에서 2013년도 대종상 후보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제목이 주는 친근감이 남다르다.


이 영화는 1970년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자크 로브와 알렉시스의 구상으로 시작되어 이후 장마르크 로세트가 이 프로젝트에 합류, 1984년 만화로 출간되었다. 1986년 앙굴렘 국제만화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고, 2000년도 완간되기까지 두 명의 작가가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상승 욕망은 인간 내면의 엔진


영화의 열차는 통상 우리가 갖고 있는 기차의 이미지나 상징성과는 완연히 다르다. 얻어맞은 듯, 놀란 듯 고통스럽게 끊임없이 질주하는 열차. 지구온난화 현상이 가속화되어 빙하기가 찾아온 지구에서 이 기차에 올라탄 사람들만이 목숨을 유지하게 된다. 마치 대홍수 시기에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생명체들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듯이.

그러나 이 기차는 여느 공동체 사회가 그렇듯 곧 계급사회가 형성되고 맨 꼬리칸은 생존을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는 사투의 장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좀 더 나은 먹을 것과 생존 환경을 얻기 위해 앞으로 전진하고자 하고, 이에 이들의 리더인 커티스와 그의 조력자 에드가, 또 정신적 스승 길리엄이 앞장을 서게 된다.

커티스가 꼬리 칸 사람들을 위해 전진하는 것은 속죄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던 그는 길리엄이 한 팔을 내주고 대신 살아남은 에드가와 함께 혁명을 일으킨다.


앞 칸으로 갈수록 무채색의 공간은 화려한 채색의 공간으로 바뀐다. 좁고 긴 통로의 열차 안이지만 이곳에는 무한히 확장된 세계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과수원, 호화 레스토랑, 고급 사립학교의 교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향락에 빠진 인간들의 클럽이 등장한다.

커티스 일행은 이 모든 곳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간다. 그들은 어느 일정한 객실에서 멈추지 않는다. 독재자 윌포드가 관장하는 '신성한 엔진'을 손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단 상승 작동을 일으키면 멈출 수 없는 인간의 내적 욕망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설국열차의 엔진이 대여섯 살짜리 어린애만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공간에서 인간의 몸에서 우러나는 물리적 힘을 받아야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아무리 첨단의 문명이라도 그것은 인간을 배제하지 않고는 무용지물일 뿐인 것이다.

타인을 위한 희생-인간 사회의 희망


젊고 건장한 청년들이 굶주림 속에서 어린아이를 잡아 먹으며 야수처럼 날뛸 때, 노쇠한 길리엄은 그들의 먹이로 자신의 팔 하나를 내주었다. 그 팔 대신 살아남은 어린 에드가는 자라서 시민 혁명의 중심에 선다. 어린아이를 잡아먹었던 커티스는 길리엄에게서 인간 선의 정점을 체험하고 약자들의 구원에 앞장선다. 그리고 길리엄처럼 엔진 속의 어린 아이를 구하려 자신의 팔을 바친다.

크로놀에 중독되어 분별력도 흐려진 남궁민수 또한 자신의 딸 요나의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뚜렷한 각성 상태가 된다. 민수는 열차를 설계한 사람이지만 오히려 열차 밖의 세계를 꿈꾼다.

아쉬운 것은 열차 문을 열기 전 마지막 결단을 내릴 때 커티스와 남궁민수, 요나가 힘껏 포옹하는 감정선에 적극 동화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 그들이 함께 해 온 감정의 극적 연대가 그토록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위기의 상황마다 발휘되던 요나의 신비스런 투시력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그에 반해 메이슨 총리로 분한 틸다 스윈튼의 연기와 상황 설정은 매우 섬세하고 흡입력이 강하다. 그녀의 신발(하층) 모자(상층)로 대변되는 계급론은 설득력이 꽤 있지만, 신발은 신화의 원형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하층 칸의 '신발'인 흑인 아이와 여성이 열차의 문을 열고 완전한 생태계에 가까워진-곰이 살아 있는-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는 약자를 보듬는 영화적 시선이며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인류의 진정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인생이라는 열차

영화를 보고나니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물음이 뻐근히 가슴 속에 남는다. 그리고 불현듯 곽재구 시인의 시 구절이 뭉클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산다는 것의 고단함을 이 가을 설원으로 가는 세월의 열차에 실어보고 싶음인가.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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