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 에세이 - '시'

아름답지 않은 세상, 아름다운 시(詩)를 쓰다.

2011.03.13 17:00:20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는 시와 산문의 차이를 말함에 있어 '시가 무용(舞踊)이라면, 산문은 보행(步行)이다.'라고 말했다. 즉, 시는 '어딘가를 목표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황홀한 상태, 생명의 충일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평화롭고, 아득한 생처럼 흐르는 강물이 관객의 마음으로 흘러든다. 아이들이 숲에서 뛰어놀고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강물로 번져가고, 강물은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반짝이는 이 평화로운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이며, 그대로 시였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세상의 정점에 천천히 떠내려 오는 한 소녀의 시신(屍身). 이 평화로운 광경이 불안해진다. 그리고 그 시신의 옆으로 '시(詩)'라는 문자가 함께 적막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아름다움에 대한 도발이며, 시에 대한 인식의 균열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신의 옆에 '시'라는 화두를 처음부터 관객에게 던지며 시작된다. 이 오프닝 장면은 영화 '시'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가롭게 물살을 가르며 유영하는 오리들의 모습에서 평화를 느낀다면, 물속에서 치열하게 물 갈퀴질을 하는 모습은 치열한 삶이다. 아름다운 시를 쓰는 시인들의 내면은 그렇게 치열하게 가슴 깊은 곳에 맺혀 있는 정서의 방울들을 종이에 담아내는 것은 아닐까. 이창동 감독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들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가공되지 않는 원석의 시어들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어놓은 것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의 어느 작은 도시, 낡은 서민 아파트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미자. 그녀는 꽃 장식 모자와 화사한 의상으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다. 미자는 어느 날 동네 문화원에서 우연히 '시' 강좌를 수강하게 되며 난생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

미자는 시상(詩想)을 찾기 위해 그 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주시하며 아름다움을 찾으려 노력한다.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 보는 것 같아 소녀처럼 가슴 설렌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찾아온다. 시의 오프닝 장면에 담긴 섬뜩한 화두처럼 소녀의 죽음에 자신의 손자가 개입되어 있었고, 가해자가 된 미자는 피해자에게 줄 보상금 500만원을 위해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몸까지 던져야 하는 쓰라린 현실과 마주한다. 이처럼 비정하고 부조리한 현실과 미자가 쓰고자 하는 시의 아름다운 세계와의 간극은 너무 멀고 처연하다.


죽은 소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강가로 갔을 때, 영화는 시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소녀가 떠내려간 강물을 바라보며 시를 쓰는 미자. 그리고 갑자기 내린 비로 시를 쓰던 노트에 빗물이 번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노트에는 아무런 글씨도 보이지 않고 오직 빗물만이 시가 되어 노트를 채운다. 빗물이 글자가 되어 시가 된다. 그 빗물이 혹시 소녀의 눈물이라면……빗물은 이제 눈물로 은유되어진다. 그 단순한 장면을 통해 시라는 화두가 재해석되어진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과 '시'는 비극적 사건을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만 다를 뿐 피해자와 가해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 기법은 유사성을 갖는다. 영화 '밀양'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받는 고통, 그리고 그것을 견디어 내는 모습을 밖으로 분출했다면, 영화 '시'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선을 '시'라는 모티브를 통해 가감 없이 보여준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느끼는 고통의 해결방식을 영화 '시'에서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 새로운 통로의 구조물은 치매의 일종인 알츠하이머병이며, 시의 세상이었다. 영화 '시'는 시를 통해 볼 수 있는 미적 세상의 시선과 자신의 손자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파괴되어간 한 어린 영혼의 아픔을 바라보는 시선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갈등한다. 아름다운 시와 어떤 방식으로든 손자의 잘못을 책임을 져야하는 도덕 사이에 방황하는 미자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 우리 양심의 초상(肖像)은 아닐까.


영화 '시'는 시상이 찾아온다고 믿었던 미자가 시상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시가 이상이라면, 시를 찾아가는 과정은 현실인 까닭이다. 아름다움만이 시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가 세상의 절박함과 아픔을 가만가만 시 속에 담아가는 이른바 깨우침의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미자가 수강하는 문화원의 시 강사-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봐야 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자는 사과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밥을 먹는 손자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슬쩍 가져온 죽은 여학생의 사진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시상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강물에 둥둥 떠내려 온 여학생이 끔찍한 일을 당한 장소를 찾아가 그 아픔을 공감해보려 애쓴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이 시라고 믿었던 그녀는 그 과정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김용택 시인의 말을 조금씩 자신이 겪은 현실을 통해 깨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시인 네루다가 남긴 흔적을 따라 산책길을 걷던 마리오가 소리를 채집하는 것과 흡사하다. 마리오는 시의 스승인 네루다를 위해 섬마을의 바람소리, 성당의 종소리, 바닷가의 파도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등등을 녹음한다. 그 소리들은 바로 가공되지 않는 시의 원석들은 아닐까. 주변의 소리를 채집하며 시적 의미를 찾아가는 마리오와 아픔을 현실적 몸으로 느끼며 시를 이해해가는 미자의 시적 여정은 무척 닮아 있다.

영화의 대미는 소녀가 강물에 몸을 던지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무수한 고통과 아픔을 겪고 난 후, 미자가 써낸 시 '아네스의 노래'는 바로 죽은 소녀를 위한 시이기도 했다. 시를 낭독하던 미자의 목소리가 소녀의 목소리로 바뀌어가면서 화면은 자살하기 직전, 철교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던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강물을 바라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눈망울……강물이 담긴 소녀의 눈망울과 마주친 관객들의 영혼에는 소름꽃이 봄날의 벚꽃처럼 환한 각성으로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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