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 에세이 - '킹스 스피치'

'말하는 인간'으로서의 숙명

2011.08.15 17:30:23


말더듬이 왕

성경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는 언어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큰 특장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언어적 인간, 즉 '호모 로쿠엔스'라고도 부른다. 인간에게 언어가 없었다면 인류문명의 진화는커녕 아직까지 석기시대의 동굴 속에 갇혀 살고 있었을 것이다.

'킹스 스피치'는 언어, 그 중에서도 구어(口語)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제목 그대로 '왕의 말'에 대한 내용이다.

아직 대영제국 왕의 실질적 권위가 살아있던 1930년대, 조지 5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은 저 유명한 심프슨 부인과의 열애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에드워드공이고 둘째는 요크 공작이다. 영국 국민들이 끝내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을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자 에드워드 8세는 즉위한 지 1년도 안 되어 왕좌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다. 따라서 별다른 준비없이 동생인 요크 공작이 왕 위에 오르는데 이분이 조지 6세이다. 바로 현 엘리바베스 여왕의 친아버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말더듬이라는 사실이었다. 평범한 일반인 같으면야 그저 불편한 장애로 끌어안고 살았겠지만, 만인 앞에 자주 연설을 해야 하는 왕의 입장으로서는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었고, 반드시 극복해야 할 난제였다.

"직업을 바꿔 보시죠."

"바꿀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에요."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는 말더듬이 남편 때문에 상담을 요청한 부인이 왕비라는 것을 모르고 다른 일을 해볼 것을 권유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에든 예속되어야 하고 그로 인한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민도, 왕도, 인간의 삶이 던지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평등한 것이다. 왕은 권좌에 앉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지만 만인의 시선 앞에서 왕도 그의 책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왕실 영화라고 하면 궁내의 사랑과 권력의 암투를 그린 것이 대부분인데, 이 영화는 왕의 지극히 사적인 단점인 말더듬이 증상에 대한 것으로서 일단 소재부터가 신선하다.


소통의 도구인 언어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쉽고 편하게 대화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각색의 지난한 과정을 늘 되풀이하는 셈이다. 언어는 나의 사고와 느낌을 표현하기에 완전하지 못하다. 자신의 상황과 정서를 완벽하게 언어로 나타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 근사치에 다가갈 뿐이다. 언어는 또 수많은 약속의 기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줄 수 있다. A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사물을 A라 말하지 않고 B로 말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도태되거나 소외되어 버린다.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에는 모든 것이 지루해진 한 남자가 자신의 편의대로 사물의 이름을 바꿔 말하다가 결국 타인과 소통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사실 언어란 두려운 존재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소통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심정과 마음에 꼭 들어맞는 표현력을 100% 발휘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언어치료사라면 이러한 말의 불완전성을 이해하고 맥락을 넘어 그 사람의 심정과 정황을 헤아릴 줄 아는, 제 3의 언어의 맥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 라이오넬 로그는 이런 점에서 특별하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비록 학위나 증서가 없는 연극배우 출신 언어치료사였지만 군인들의 전쟁후 스트레스성 외상을 치료하며 그는 수많은 임상 경험을 쌓았다.

"때로 언어는 구원일 수 있습니다. 웅변이나 격언이 아닌 잡담도 종종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됩니다. 언어에 수없이 절망하면서도 그렇기에 사람들은 또다시 다른 이의 말에 조심스럽게 귀기울이곤 하는 거겠지요."

어느 문화평론가의 말처럼 로그는 우선 왕을 아명인 '버티'라 친근하게 부르며 그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려 노력한다. 심지어 욕설도 거침없이 내뱉게 한다. 허위의식을 내던지고 소탈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자 애쓴다. 그리하여 왕에게는 어린 시절의 내적 상처가 있음이 밝혀진다.

엄격했던 부모, 왼손잡이였지만 강제로 오른손을 쓰도록 훈련 받았던 것은 세상의 보편적 획일성에 억지로 맞춰지는 훈련임과 동시에 본인의 선천적 성향을 부정케 하는 수치심을 유발했던 것이다. 또한 형만을 편애하며 왕가의 어른들 눈을 피해 때로 밥을 굶길 정도로 3년간이나 작은 왕자를 핍박했던 유모……. 영국 왕실에서 유모가 왕자를 구박하는,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누가 생각했던가. 세상살이의 부박함은 궁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사람을 살리는 관계의 언어

라이오넬 로그는 치료법의 일환으로 셰익스피어의 책을 읽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시적인 대구와 비유,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대구법은 위엄과 리듬감을 주고 비유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길러 준다. A를 B에 빗대어 표현하는 비유는 모든 관계의 친화력을 의미하고 서로 의지하여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묘파한다. 이러한 글을 소리내어 읽음으로써 왕은 알게 모르게 관계의 상처로부터 서서히 치유되어 간다. 사실 조지 6세는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었으므로 말더듬이가 되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상처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하고 싶은 말을 그 때마다 꿀꺽 삼키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로그를 만나 진정한 우정을 나누면서 마음 편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로그는 왕으로서 깍듯이 예우하지만 결코 그 권위에 짓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지혜로운 왕으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음을 알고 성심으로 도우려 한다. '크게 될 사람인데 자기 그림자에 짓눌려 있다.'면서.

"감히 어딜 앉느냐"

"그냥 의자일 뿐입니다."

"역대 왕들이 앉던 자리다."

"낙서도 많은데요. 왕의 엉덩이는 금으로 만들어졌나요·"

대관식 장면을 연습하던 중 둘이 나눈 대화이다. 이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왕의 책무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덜어 주려 한 것이었다. 로그와의 인간적 친화력으로 서서히 말더듬이 증상을 회복해가고, 드디어 조지 6세는 히틀러의 전쟁 음모에 맞서는 대국민 전시연설을 성공적으로 발표하여, 영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결집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교육학자 헤르바르트는 '한 사람의 양모(良母)는 백 사람의 교사에 필적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의 좋은 교사는 양모의 자리를 대신 할 수도 있다'고. 두 사람은 평생 우정을 나누었고, 로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왕실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조지 6세를 연기한 콜린 퍼스 또한 왕실의 품위와 이미지를 높인 공을 인정받아 '커맨더' 훈장을 받았다.

왕도 내밀하고 부끄러운 아픔을 갖고 있으며 왕이기 때문에 더욱 부끄러울 상처를 극복하는데 누구보다 몇 배의 용기가 필요했음을 영화는 차분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어떤 문제이든 사람과 사람과의 진정성과 사랑이야말로 가장 큰 처방임을 또한 말해 주고 있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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