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보는 맛있는 영화 에세이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선량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사회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문화의 힘

2012.04.08 17:20:24


"전쟁을 비롯한 정치적인 문제들이 이란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 상을 국민에게 바치고 싶다."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등 3관왕의 위업을 이루고, 아카데미 외국어상까지 받은 아쉬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수상소감은 위와 같았다.

오랫동안 우리들의 나라밖 관심사라면 미국이나 유럽쪽이었다. 중동지방은 우리에게 열사의 나라, 유수의 기업체 노동자들이 건설의 땀을 흘린 곳이라는 데서 별반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근래에는 걸프전이나 탈레반 문제, 내전과 테러의 위험이 들끓는 지역이라는 인식 정도였다. 그러한 이미지를 다소 불식시킨 것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때문이었다.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체리 향기' 등의 영화는 이란에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파르하디 감독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도시 소시민들의 삶에 카메라를 밀착시켜 그 현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줌으로써 이란에 대해 이웃으로서 더 가까워진 느낌과 함께 친근감을 유발한다. 극한의 상황 설정 없이도 자연스럽게 배역을 소화해내는 배우들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연기력 또한 이 영화에 몰입케 하는 매력적 요소이다. 딸 역의 테르메는 실제 감독의 딸로서 어른못지 않은 천연스런 연기를 보이고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부부-하지만 이혼 법정에 선

씨민은 딸의 교육을 위해 미국에 이민가고자 비자를 받아놓은 상태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는 남편 나데르는 아내의 요구를 거절한다. '이혼을 원하는 사유가 단지 그것뿐이냐'는 판사의 물음에 '이이는 좋은 사람'이라는 씨민의 대답에서 남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여전히 묻어난다. 다만 남편이 갖고 있는 삶의 저울이 자기 쪽으로 기울지 않고 시아버지에게 치우쳐 있다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떠나겠다는 자신을 붙잡지도 않고 치매 아버지를 내세우며 '갈테면 가라'는 무심한 태도가 너무도 서운한 것이다. 부부가 내세우는 자신들의 주장은 모두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목적을 취하기 위한 과정은 결코 쉽게 풀리지 않는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의사 표현도 부족하고 거동이 불편한 치매 아버지를 모시는 일은 이 부부에게 딸의 교육이나 이민 문제보다도 더 큰 삶의 쟁점이다. 무력한 한 사람의 생애가 생동하는 다른 가족의 삶에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바윗돌로 박혀 있다. 이런 아버지를 돌보는 나데르의 모습은 유교적 전통관의 한국인보다도 더 헌신적이며 눈물겹다. 분별력이 다 사라진 것 같은 치매 노인도 씨민이 짐을 싸 집을 떠나려 하자 '너 어디 가는 거냐'며 며느리의 손목을 꼭 쥐고 놓지 않는다.


착하고 신실한 가정부-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결국 씨민이 떠나고 나데르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가정부 라지에를 고용한다. 첫날부터 라지에는 바지에 용변을 본 할아버지를 씻겨야 하는 곤혹스런 입장에 놓인다. 그것이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는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물어볼 정도로 라지에는 신실한 믿음을 지녔다. 잠시 집안일을 하는 사이 할아버지는 맨발로 거리를 나가 헤매고 다닌다. 할아버지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라지에는 차에 부딪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의 책임감도 지니고 있다.

이튿날 딸 테르메와 같이 집에 돌아온 나데르는 라지에가 종적없이 사라지고 아버지가 손목이 침대에 묶인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돈까지 없어진 상태에서 나데르는 라지에를 원망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잠시 후 돌아온 라지에는 도둑으로 몰리고 할아버지를 방치했다는 비난에 내쫓긴다. 하지만 선량한 마음씨의 라지에는 도대체 할아버지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여 곧 다시 되돌아온다. 그리고 나데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현관 밖으로 떠밀리고 유산이 되어 버린다.

라지에의 남편 호얏은 살인죄로 나데르를 고소하고, 라지에는 자신이 임산부라는 것을 알고서도 자신을 내팽겨쳤기 때문에 유산이 되었다고 항변한다. 나데르에게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자신과 집안 가정교사와의 임신 관련 대화를 분명 나데르가 들었을 거라는 주장을 얼떨결에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나데르가 임신 여부를 알았으리라는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화면에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듯 인생이란 순간을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며, 찰나의 진실을 포착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보여 준다.

사실 유산의 직접적 원인은 할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차에 치였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런 정황으로 보아 나데르의 책임 또한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진실은 모호한 경계선에 아슬아슬 위치해 있는 것이다.


부모와 가정을 품고자 하는 딸 -하지만 결국 해체되는 가족

가장 연민이 가는 인물은 테르메이다. 아직 11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순수한 소녀는 부모의 이혼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고심한다. 테르메가 굳이 엄마를 냉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엄마에게 집으로 돌아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같이 웃고 장난치는 관계가 있다면 서로 그다지 이해 관계가 얽히지 않은 두 소녀, 테르메와 라지에의 딸 소마예이다. 둘은 심지어 씨민 부부가 라지에의 집에 합의금을 주러 갔을 때도 정원에서 거리낌없이 같이 놀고 있다.

결국 돈을 얻지 못한 라지에의 남편 호얏은 나데르 차의 앞유리를 깨놓는 것으로 분풀이를 한다. 그 차를 타고 달리는 한 가족의 균열된 모습은 그들의 앞날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다시 법정에 선 부부, 테르메 또한 판사 앞에 불려 나가 부와 모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가혹한 질문을 받게 된다. 어린 소녀는 나중에 답하면 안되겠느냐고 안쓰럽게 되묻는다. 영화는 끝까지 소녀의 선택을 보여 주지 않고 부부가 서로 엇갈리게 앉아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난다.


선인과 악인 사이의 허약한 경계

이 영화는 명쾌한 권선징악적 구도를 갖고 있지 않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선인과 악인이란 이분법은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꼭 누구의 잘못이랄 것 없이 서로의 이해와 신념이 충돌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관객은 딱히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는 불편한 심정으로 등장인물들과 같이 갈등을 겪어야 한다. 또한 사회의 부조리는 사람들의 커다란 악행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순간적 판단 미숙과 소소한 편의주의가 만든다는 사실을 영화는 깨우쳐 준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는 좋은 책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만든다. 좋은 영화 또한 그러하다. 비현실적 판타지와 멋진 액션으로 러닝타임만 즐거운 영화가 있는가 하면, 비루한 일상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길어올려 한참동안 곱씹히는 영화야말로 오래 반짝일 것이다.

윤기윤 기자 jawoon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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