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가 고향인 할머니는 1943년 일본군에 끌려가 중국에서 2년 정도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 때 나이 16세였다. 무작정 끌려가 눈을 떠보니 주위엔 총칼을 멘 무서운 일본군들뿐이었다.
다행히 위안부 생활 도중 중국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지하로 피신했다. 지하에서 생활한지 2~4일이 지나 한국은 해방됐고 일본군들은 철수했다.
이 할머니는 UN군의 도움을 받아 신의주로 건너왔다. 신의주에서 한덩어리의 주먹밥으로 요기를 한 뒤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함께 끌려갔던 동네 친구는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친구 부모님은 매일같이 이 할머니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던 할머니는 몸과 마음의 피멍이 가시기도 전 떠날 결심을 했다. 그 때 나이 19세였다.
발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전국을 떠돌았다. 우여곡절 끝에 속리산에 정착한 뒤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됐다.
그때부터 집 앞에 태극기를 걸었다. 태극기는 유일한 힘의 원천이었다.
이 할머니는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생지옥 같았던 위안소 공포를 떨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국이 원망스러울 법도 할 터. 하지만 할머니는 대한민국을 끔찍이 사랑한다. 젊은 인재들이 많이 나와야 나라가 강해진다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장학금으로 내기도 했다.
20년 전부터 장사를 하며 틈틈이 모아뒀던 2천만원의 거금이었다.
할머니는 "젊은 청년들이 나 같은 불행을 겪으면 안 된다는 마음뿐이다. 젊은 인재를 육성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광복 66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여전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정부의 태도에 이 할머니는 그 때의 고통과 분노가 떠올라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 김경아기자